[미래읽기] 원칙 있는 복지국가
(서울=뉴스1) =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5월이 갔다. 아쉬움과 설렘이 뒤섞인 시간의 문이 닫히고, 이제 현실의 시간이다.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고, 무엇을 먼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당연히 오랜 시간 동안 더 많은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 문제부터 차분히 그리고 빠르게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동시에 모두가 당장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여러 번의 끝과 시작이 교차한 후에 과거의 어떤 결단은 모두를 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한다.
사회복지의 기본 원칙은 다양한 사회적 위험에 의해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들을 지원함으로써, 이들의 자립을 돕는 것이다. 즉, 어려움에 처한 사회구성원이 스스로 일어서 거친 세상 속으로 다시 나아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자신의 앞가림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복지국가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정책은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기울어진 시소를 완전한 수평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울기를 줄이는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정책은 정책대상자의 도덕적 해이를 초래하거나, 정책대상자에 대한 지나친 지원으로 이미 자립하여 자신의 몫을 열심히 일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과의 역전 현상을 유발하는 등의 매끄럽지 못한 정책설계를 경계해야 한다.
새 정부는 이전 정부에서 월 30만원이던 기초연금을 월 40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공약하였다. 최근 일각에서는 기초연금을 월 40만원으로 인상하는 공약이 실현되면 국민연금에 가입할 유인이 없어진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기초연금이 40만원으로 인상되면, 사회보험인 국민연금 평균액(특례연금 포함)과 비슷한 수준이 된다. 이에 더하여, 국민연금액이 월 46만원을 초과하면 최대 50%까지 기초연금액이 삭감된다. 굳이 젊은 시절 차곡차곡 사회보험료를 내고 은퇴 후 국민연금을 받기보다는 국민연금 가입을 회피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인상되는 기초연금에 기대면 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2008년 국민연금 개혁 시에 도입된 기초노령연금을 기초연금으로 확대·개편하는 때부터 지적되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013년 「2014년도 정부 성과계획 평가」 보고서에서 2014년 7월 도입되는 기초연금이 국민연금의 1차 안전망 기능을 훼손하지 않도록 제도 설계를 보완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하였다. 국민연금 가입기간과 연동해 기초연금액을 정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길수록 기초연금을 적게 주는 기초연금안이 시행되면 저소득층은 국민연금에서 탈퇴하거나 11년까지만 가입해 65세 이후에 기초연금을 받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였다. 즉, 자력으로 사회보험(국민연금)을 통해 스스로 노후를 대비하기보다는 국가가 제공하는 수당(기초연금)에 의존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문제에 주목하기보다는 심각한 노인 빈곤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용돈 수준에 불과한 기초노령연금을 국민연금 A값(국민연금 수급 직전 3년 간의 평균소득월액을 전국소비자물가변동률을 적용하여 연금 수급 전년도의 현재가치로 환산하여 합산한 금액을 3으로 나눈 금액)의 10% 수준으로 인상한 기초연금의 도입을 우선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기초연금이 생득적으로 안고 있던 국민연금과의 관계설정 문제는 더욱 심각한 국면에 접어 들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017년 「인구구조 변화와 사회안전망 정책 분석 Ⅱ: 노후소득보장대책 분석」 보고서에서 제동장치를 점검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제거한 조치에 대해 경고하였다. 당시 정부는 2018년 기초연금액을 월 25만원으로 인상하고, 2021년까지 월 30만원으로 인상하기로 발표하였다. 국민연금 A값 기준이 아닌 정치적 의사결정에 의해 기초연금액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기초연금액 결정 기준을 변경해버린 것이다. 2022년 기초연금액을 월 40만원으로 인상하겠다는 공약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이전보다 높은 고갯길을 힘겹게 오르는 모습과 다름없다. 내리막길이 얼마나 더 위험해질지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10년 가까이 기초연금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은 그동안 한국이 각종 사회정책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크고 작은 부조리를 짐작할 수 있는, 열정이 냉정을 앞질러 벌어진 촌극의 결정판이다. 그러나 쓴웃음 지으며 넘기기에는 원칙을 잃은 분배가 가져올 미래가 두렵기 그지없다. 정치적 판단에 의해 수시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시소 위에서 우리는 어떠한 공정을 경험하고, 어떠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나보다 어려운 개인이 나처럼 자립할 수 있도록 국가가 돕기를 바라기보다는 냉정을 앞선 열정이 빚어낸 비합리적인 제도가 나에게만은 요행을 베풀기를 바라는 것이 자연스러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재빠르게 국민연금을 개혁하고, 기초연금을 인상하고, 부모급여를 지급해야 하는 이때, 한가롭게 복지의 원칙을 운운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새롭게 도입하거나 기존의 것을 확대하기보다는 이미 추진되고 있는 사회정책이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보고, 원칙을 무시하며 팽창해온 제도의 비합리성이 깊은 부조리의 골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설 수 있는 자립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전제를 바로 세우는 일, 그리하여 원칙 있는 복지국가로 향하도록 대한민국의 방향키를 바로 잡는 일을 먼저 하는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
/이채정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미래읽기 칼럼의 내용은 국회미래연구원 원고로 작성됐으며 뉴스1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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