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과 사의 사분면' 김승범 "의사는 죽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
의사이자 예술가로서 바라본 삶과 죽음
"생사를 바라본 각자의 시선이 우열없이 놓이길"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조명을 낮춘 한쪽 벽면을 80대 후반에 접어든 노인의 옆모습이 가득 메웠다. “8년 전 요양병원에 있을 때 만난 환자예요. 만성 폐질환이 있어 고농도 산소 호스로 호흡에 도움을 받고 있어요.” 노인의 얼굴 옆으론 그의 젊은 시절 사진이 붙어 있다.
의사이면서 작가인 김승범(45)의 ‘생과 사의 사분면’(6월 12일까지·아트스페이스엣) 전은 제목처럼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한다. 20여년간 임상의사로 활동하며 예술가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냈던 김승범의 첫 개인전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전시는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로 기획됐다. 최근 서울 강남구 아트스페이스 엣에서 만난 김승범 작가는 “관람객들이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이 전시는 기획의 독특함이 강렬한 호기심을 던진다. 작가의 “이과적 상상력”과 그의 내면에 침잠한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전시의 원천이 됐다. 전시는 작가가 일상에서 포착한 수백 장의 사진 중 많게는 30여 장을 선별해 한 장씩 보고, 사분면 분석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작가와 관객이 일대일 대면을 한다는 점이 오프라인 전시의 특별함을 살렸다. 사분면은 x축과 y축 모두 ‘+’ 쪽은 생(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쪽은 사(죽어있는, 생명이 없는)로 정해뒀다. 여기에 x축은 절대적·객관적 기준, y축은 상대적·주관적 기준으로 삼았다. 김 작가는 “객관적, 주관적이라는 것은 나를 둘러싼 물리적 세계와 내 머릿속 세계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요양병원에서 호흡기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견디는 노인, 도로 위 수채 구멍에서 피어난 푸른 잎사귀, 한겨울을 견디는 메마른 나뭇가지, 끊임없이 파동을 일으키는 물결…. 관람객은 사진에서 받아들인 생사의 기준을 사분면 안에 점으로 찍는다. 노인의 모습과 수채 구멍의 잡초에서 ‘생의 희망’을 발견했다면 이들을 둘러싼 물리적 여건과는 무관하게 y축의 플러스 쪽으로 점을 찍는다. 관람객이 100명이라면 100개의 시선으로 100개의 점이 만들어지는 전시다.
“제가 찍은 사진을 재료 삼아 관객들은 자신의 머릿속 세계를 비춰 보고 어딘가에 점을 찍는 거죠. 무생물의 사진을 보고 누군가 y축 플러스에 점을 찍었다면, 죽음의 물리적 정도에 대한 해석보다는 주관적 생명력을 더 강하게 느꼈다는 거겠죠.”
이 과정을 통해 김 작가는 “우리가 가진 각자의 고유한 시선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우열 없이 놓여지길 바란다”고 했다.
어린시절 큰 사고를 겪고, 수십년 간 의사로 살아온 작가의 삶과 경험은 깊은 주제의식과 기획의 바탕이 됐다. 그는 “의사는 순간순간 판단을 해야하는 걸 훈련받는다”며 “눈앞의 환자와 만나 바로 판단하고 솔루션을 줘야 하기에, 사분면 분석은 전략적 사고의 하나로 익숙하게 사용했다”고 말했다.
적극적인 참여자로 전시에 들어서면 어찌됐건 “사분면 안에 점을 찍어야” 한다. 생사의 의미를 들여다 보는 과정은 꽤 낯선 일이다.
“우리는 죽음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죽음이 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요. 의사는 다른 사람들보다 죽음에 더 가까이 있고, 그걸 알아보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어떤 경우엔 삶이 너무나 강력하고, 어떤 경우엔 너무나 연약한데, 의사는 죽음과 싸워 절대 이길 수 없고, 늘 지는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는 “조금 더 집요한 시선, 치우친 시선을 가지고 있어 그것이 스스로를 괴롭게도 했고 그 괴로움이 분노로 이어지기도 했고, 그로 인해 예술가로 나아가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작가 김승범의 주제의식은 의사라는 직업인이 가진 가치관의 연장선이다.
“현대의학의 발전 과정 안에서 의사와 환자는 마치 권력 관계처럼 돼버렸어요. 저는 의사로서 일방적으로 치료를 해준다기 보다 사람들이 자기 문제를 스스로 이해하고 해결하는 힘을 기르기를 바라는 쪽이에요. 그래서 ‘인간적인 의료’라는 말을 많이 썼고, 기존 병원의 모습을 해체해 새로운 병원으로 만들려고 했고요.”
2007년부터 운영해 화제가 된 카페 겸 병원 ‘제너럴닥터’가 그것이다. 그는 “내가 보는 인간에 대한 자세, 권력관계에 대한 거부감과 경험들이 뒤섞여 메시지와 주제의식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의사로서 피할 수 없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은 그가 일상을 바라보는 무수한 시선으로 담겼다.
인간의 삶에서 쉽게 풀 수 없는 난제인 죽음을 사분면 안으로 가져오자, 관람객은 삶과 죽음을 직면하며 각자의 시선을 마주한다. 전시는 즐거운 호기심으로 찾았다가, 묵직한 질문과 함께 떠나게 된다. 관객들이 사분면 안에 남긴 점은 NFT 작품으로도 선보일 계획이다.
“생사에 집착하고, 동정과 희망을 느끼면서도, 작은 벌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기도 해요. 그게 인간이고, 그게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인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은 결국 자기 중심성을 벗어날 수 없고, 그것이 잘못된 거라 말할 수 없어요. 우리는 살기 위해 옳고 그름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을 뿐이니까요. 잠깐이라도 멈춰서 깊이 있게 돌아보는 것도 가치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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