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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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가 고갈되는 편인데 촬영 현장에서는 생동감이 넘쳐요.
결국 저라는 사람은 배우로서 존재할 때 생기를 찾는 거 같아요.
“여전히 연기에 목말라요”
여느 워킹맘이 그렇듯 일터에서는 연기하고, 집에서는 집안일과 육아를 하면서 보냈어요. 저의 패턴 안에서 반복되는 일들을 하나씩 해내면서 살다 보니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웃음)
tvN 드라마 <이브>로 시청자를 만나죠. 극 중 ‘한소라’는 어떤 인물인가요?
전형적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한 여성이에요. 어릴 때부터 최고의 수준을 요구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최고에 집착하는 인물이죠. 자신감을 넘어 모든 사람이 본인의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함을 지녔어요. 겉으로는 당당하지만 성격적으로 결함과 아픔이 있고요. 강인한 캐릭터에 대한 갈망이 있던 찰나에 만난 작품이에요. 제가 갖고 있는 에너지를 발산하기에 적합하겠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심했어요.
이번 배역을 위해 몸매 관리를 열심히 했다고 들었어요.
사실 운동을 꾸준히 하는 편이 아니에요. 한소라라는 인물이 가진 예민함을 외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웨이트트레이닝을 시작했어요. 극 중에서 탱고를 추는 장면이 있는데 건강미가 돋보이면 좋을 거 같았거든요. 몸무게는 3~4kg을 줄였고, 근육을 늘리는 데 신경 썼어요. 언뜻 보이는 몸 선에서 탄탄함이 느껴지면 캐릭터가 가진 강인함이 극대화될 거라고 생각했죠.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몸매를 가꿨는데, 이제는 몸을 만들어놓은 게 아쉬워 운동을 지속하고 있어요.(웃음)
배역에 따라 외형 관리를 철저히 하는 편인가요?
연기뿐 아니라 캐릭터에 맞는 외형을 만드는 것도 배우에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부드러운 배역을 만나면 그에 맞는 준비가 필요하고, 반대로 날카로운 배역을 맡으면 식단을 조절해 인상이 달라 보이게 해요. 같은 눈빛 연기를 해도 외형에 따라 다른 인상을 심어준다고 생각해요. 시청자의 입장에서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더 잘되기도 하고요.
40대가 되면 몸매 관리가 어려워진다고 하죠.
식단이 가장 힘들어요.(웃음) 평소 밀가루를 좋아해 닭 가슴살이나 샐러드만 먹는 다이어트는 시도조차하지 않아요.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대신 매일 아침과 저녁에 체중계 위에 올라가요. 체중이 늘었다면 다음 끼니의 양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식단을 관리해요.
영화 <안녕하세요> 개봉도 앞두고 있는데 <이브>의 한소라와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들었어요.
<안녕하세요>의 ‘정서진’은 굉장히 따뜻한 인물이에요. 다방면의 욕망에 사로잡힌 한소라와는 180도 다른 인물이죠. 공교롭게도 영화 개봉과 드라마 첫 방송 날짜가 같아요. 정반대의 캐릭터를 같은 시기에 선보이게 됐는데, 보시는 분들이 몰입에 방해가 되진 않을까 걱정되기도 해요. 하지만 다채로운 모습을 선보일 수 있다는 점에선 기회라고 생각해요. 두 작품 모두 열과 성을 다했으니 잘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작정하고 세어봤는데 지난 20년간 5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더라고요.(웃음)
한 해당 2~3편의 작품에 출연했어요. 나름대로 다채로운 연기를 시도한 거 같은데, 대중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드라마의 시청률, 영화의 흥행 여부에 따라 제 이미지가 한 방향으로 굳어지는 거 같아요. 저를 따뜻한 이미지를 가진 배우로 여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로 기억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면에서는 헛헛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배우의 길을 걸어가면서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여전히 작품을 선정하는 데 있어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가장 커요. 캐릭터가 처한 환경, 정서적 상황, 작품의 장르 등을 고려했을 때 지금까지 맡았던 것과는 다른 부분이 있어야 끌리더라고요.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로 각인되기 위해 더 열심히 활동할 거예요.
공백기 없이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궁금해요.
평소에는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가 고갈되는 편인데 촬영 현장에 있을 때는 생동감이 넘쳐요. 현장에서만큼은 웬만한 남자 배우나 스태프보다 체력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결국 저라는 사람은 배우로서 존재할 때 생기를 찾는 거 같아요.
40대에 접어들면서 배우로서 맞게 된 변화가 있나요?
시장이 점점 치열해진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어요. 일단 탄탄한 연기력을 자랑하는 또래 배우가 많아요. 그래서 마음을 느슨하게 가져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부족한 부분이 없는지 고민해보고 하나씩 해결하고 채워가면서 다음 스텝을 밟아야 하죠.
치열한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작품으로 대중을 만나고 있죠. 유선이 작품에 선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이 많아서?(웃음) <이브> 감독님께서 말씀하시길 앞서 KBS2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에서 김복실 역이 인상 깊어서 캐스팅했대요. 이번 배역과 180도 다른 캐릭터임에도 이번 작품에서 같이 작업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대요. 제가 악역으로 분했던 작품을 보고 연장선상에서 출연을 제안한 게 아니라 더 감사했어요. 일종의 가능성을 읽어주신 거 같아서요.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감사한 분이 정말 많아요.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어요. 그분들 덕분에 지금까지 다채로운 캐릭터와 장르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고, 설렘을 잃지 않고 연기할 수 있었어요.
여전히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 커 보여요.
어떤 배역이든 한 번에 그림이 그려지는 역할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새로움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제 안에 내재된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작품에 매력을 느껴요. 배우로 살아온 지 20년이 흘렀지만, 아직 저만의 색을 찾진 못했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이정은 선배님에게 연기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어요. 어느 시점부터 저의 연기가 진부하게 느껴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조언을 구했죠. 선배님께선 정말 잘 맞는 캐릭터를 한번 만나면 답답함이 해소될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슬럼프를 딛고 설 수 있는 발화점이 될 테니까 믿고 기다려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선배님께서 해주신 조언에 따라 제 자리에서 묵묵하게 기다리기로 했어요.
연기에 대한 고민은 진행형이군요.
연기를 하면 할수록 더 긴장하게 돼요. 데뷔 초에는 어떤 연기든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저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많다는 현실에 부딪히고 깎이면서 저의 부족함을 마주하게 됐고, 다른 배우들의 연기력을 인정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졌어요. 적당한 겸손함은 필요하지만 연기에 있어 자신감은 중요한 자원이거든요. 그런데 자존감이 사라지면서 ‘내가 과연 연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위험한 생각에 사로잡혔죠. 한때는 제 연기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기도 했어요. 마음이 약해지는 시기를 지나오면서 스스로에 대한 신뢰만큼은 깨뜨려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평소보다 더 많이 노력해요.
사람들이 저를 필요로 할 때 가장 행복해요. 저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의미니까요.
저에게 한 캐릭터를 믿고 맡겨주는 것만큼 감사한 일이 없어요.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느껴요.
“엄마는 왜 광고에 안 나와?”
초반에는 아내, 엄마로서 집안일과 육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어요. 대본을 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어 조바심을 느끼기도 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에게 주어진 시간을 밀도 있게 활용하면 충분히 해낼 수 있더라고요. 이후로는 일과 가사를 병행하는 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희 집에는 ‘배려 모드’가 있어요. 작품에 임할 때 남편과 딸이 한마음으로 제가 연기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하죠. 남편은 가사를 도맡고, 아이는 저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떼쓰지 않아요. 지금 두 사람은 <이브> 촬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웃음) 스케줄이 한가해지면 저를 배려해준 시간을 보상해줘야죠.
가족 간의 호흡이 좋군요.
남편과 딸은 굉장히 밝은 에너지를 갖고 있어요. 저의 어두운 부분을 환하게 밝혀주죠. 덕분에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받아도 쉽게 털어낼 수 있어요. 세 식구가 함께 있을 때 가장 많이 웃게 돼요. 특히 딸은 제가 낳은 자식인데 도리어 저에게 밝은 기운을 불어넣어줘요.
딸은 엄마의 직업이 배우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인정해주고 좋아해요. 나아가 엄마가 더 인기 있는 연기자가 되길 바라기도 하죠.(웃음) 때때로 “엄마는 왜 광고에 안 나와?”라고 물어봐요. 아이가 엄마를 더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무엇인지 궁금해요.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와 tvN <우리들의 블루스>요. 두 작품을 시청하면서 드라마가 흥행하는 데는 수많은 요소가 운명처럼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대본과 연출, 배우와 모든 스태프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 좋은 작품이 된다는 것을 말이죠. 특히 두 작품은 관록 있는 배우들의 명연기와 젊은 친구들의 풋풋하고 밀도 있는 연기가 인상적이에요. 어느 한 부분이 특출나게 좋다기보다 제작진과 출연진의 공과 땀, 노력이 느껴져요. 그래서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요즘 눈여겨보는 배우가 있나요?
배우 손석구요.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에서의 연기가 굉장히 좋았어요. 그리고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주연배우 김태리의 연기도 인상 깊었어요. 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더라고요. 내공이 어마어마한 배우라고 생각해요.
시청자의 입장에서 모든 드라마를 섭렵하고 있네요.(웃음)
대중이 많이 언급하는 작품은 꼭 챙겨보려고 해요. 작품이 잘되는 이유와 호평을 받는 배우들의 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제가 맡은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는 것만큼 모니터링을 하는 시간도 중요해요. 보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어요.
요즘 유선의 인생에서 화두는 무엇인가요?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이요. 최근 한 책에서 “그랬더라면이라는 후회는 얼마나 슬픈 것인가”라는 문구를 읽었는데 크게 와닿았어요. 누구나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곱씹으면서 후회해본 경험이 있을 거예요. 생각해보면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고 결과가 바뀌지 않는데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어떤 자리에 서 있든 후회로 남지 않도록 노력해요. 촬영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고, 작은 신이더라도 최선을 다해 몰입해 가장 좋은 결과물을 내놓자는 마인드예요. 또 촬영을 마치고 귀가한 뒤에는 피곤해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고 하죠.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날들을 귀하게 대하는 게 삶의 태도가 됐어요.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요.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이 소중해요. 특히 수많은 배우 가운데 저를 선택한 데는 믿음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저에게 한 캐릭터를 믿고 맡겨주는 것만큼 감사한 일이 없죠. 저의 연기를 신뢰하는 제작진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느껴요. 엄청난 에너지가 생기기도 하고요.
지난 인터뷰에서 ‘믿고 보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나요?
지금도 과정에 있죠.(웃음) 작품을 보는 시청자와 관객에게 만족감을 주는 건 배우의 사명이니까요. 제 연기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배우로서의 위치를 확인해요. 그런 의미에서 믿고 본다는 수식어는 큰 선물이죠.
끝으로 연기 인생에서 꼭 만나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나요?
형사나 검사, 판사처럼 주로 남성의 캐릭터로 인식되는 배역이요. 남성들과 에너지를 겨뤄도 결코 밀리지 않는 캐릭터를 만나고 싶어요. 여전히 강인한 연기에 대한 갈망이 있었어요. 때때로 저 자신이 유약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무방비 상태에서 쉽게 무너지거든요. 실제 유선의 모습이 강인함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연기로 해소하고 싶은 거 같아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액션에 도전하면 좋겠단 마음도 있어요.(웃음) 지금까지 다양한 작품으로 대중을 만났지만, 아직 해보지 못한 연기가 많아요. 다채로운 얼굴로 인사드리는 게 배우로서 가장 큰 목표예요.
모든 질문에 신중하게 고민을 이어갔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는 하나같이 묵직했다. 스스로를 유약한 사람이라고 설명했지만 누구보다 강인했고 그 누구보다 단단해 보였다.
에디터 : 서지아(패션), 김연주(인터뷰) | 사진 : 주용균 | 스타일링 : 장은혜 | 헤어 : 이루나(차홍) | 메이크업 : 현승아(차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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