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독립운동가에 한인애국단 안경근·이덕주·최흥식

박대로 2022. 5. 3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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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일제강점기 한인애국단에서 일본군 고위 관료 처단을 위해 군사 교육과 의열 투쟁을 주도한 안경근·이덕주·최흥식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한인애국단은 일본군 주요 인물을 처단하기 위해 1931년 김구 선생 주도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결성된 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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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한인애국단, 일본군 주요 인물 처단 조직

[서울=뉴시스]안경근 선생.2022.05.31.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일제강점기 한인애국단에서 일본군 고위 관료 처단을 위해 군사 교육과 의열 투쟁을 주도한 안경근·이덕주·최흥식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한인애국단은 일본군 주요 인물을 처단하기 위해 1931년 김구 선생 주도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결성된 단체다.

안경근 선생은 안중근 선생의 사촌으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1918년 국내에 가족 모두를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선생은 1924년 중국 운남성 곤명의 운남강무학교를 졸업, 만주 정의부에 참가하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도 근무하면서 군사 인재를 양성했다. 1931년 한인애국단에서는 윤봉길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독립유공자 탄압을 피해 김구 선생 신변을 보호했다.

선생은 1926~27년(황포군관학교 교관), 1934년(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황포군관학교 전신)에 걸쳐 조국 독립을 위해 꼭 필요한 군사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은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 창설의 핵심 세력이 돼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서울=뉴시스]이덕주 선생 공판기록.2022.05.31.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1937년 7월 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선생은 군사위원으로 선임됐다.

이덕주 선생은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20세에 조국 독립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대한교민단 산하 의경대, 상해한인독립운동청년동맹, 상해 한국독립당, 상해 한인청년당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1932년 3월 '조선총독을 처단해야 한다'는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고 황해도 신천에 도착했다. 유진식과 함께 조선총독 처단 의거 준비를 하던 선생은 신천경찰서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취조 중 조선총독 처단 계획이 발각되면서 의거는 불발됐다.

선생은 1932년 7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살인예비, 치안유지법, 총포 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최흥식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20세에 귀향한 뒤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

선생은 상해 도착 후 윤봉길 의사가 취직했던 종품공사에서 1931년 12월부터 3개월 정도 근무하던 중 한인애국단 숙소를 사용하면서 한인애국단과 인연을 맺었다.

[서울=뉴시스]최흥식 선생.2022.05.31.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선생은 "1932년 5월26일부터 30일까지 리튼(Lytton) 조사단이 대련에서 현지 조사 일정이 있는 만큼 국제적인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대련에 있는 관동군 사령관, 남만주철도 총재 등 일제 고위 관료를 처단해야 한다"는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았다.

리튼 조사단은 만주사변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국제연맹이 영국이 파견한 조사위원회다.

선생은 1932년 5월26일 오후 7시40분 리튼 조사단 일행이 대련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선생은 대련으로 나오는 관동군 사령관과 남만주철도 총재를 유상근과 함께 처단하기로 했다.

선생이 대련의거 준비 과정에서 중국 상해로 보낸 전보를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이 의심했다. 일본총영사관은 수취인을 확인한 뒤 관동청에 발신인 체포를 요청했다. 선생은 거사일 이틀 전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선생은 대련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안경근 선생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이덕주 선생은 1990년, 최흥식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daer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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