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칼럼] 투자자 대충 속여 상장할 수 있는 시기 지났다

정해용 기자 2022. 5. 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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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9월 선박기자재회사 파나시아는 기업공개(IPO) 수요예측을 앞두고 기업가치 고평가 논란이 일자 공모 일정을 취소했다. 상장 주관사였던 한국투자증권은 2019년 7월 상장 전 지분투자(프리IPO)를 통해 이 회사의 주식 26만6660주를 주당 1만1250원에 취득했다. 하지만 1년 후 IPO 과정에서는 공모가를 3만2000~3만6000원으로 정했다. 프리IPO로 투자했을 때보다 3배 이상의 기업가치를 책정한 것이다. 시장에서는 “주관사가 1년 전 1만원대에 취득한 주식을 3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청약하라는 것이냐”는 비판이 나왔고 IPO는 철회됐다.

상장을 추진할 당시 파나시아는 매출 3559억원(이하 연결 기준), 영업이익 835억원을 기록해 1989년 회사 설립 이래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프리IPO로 지분을 먼저 받았던 증권사와 기업의 과욕(過慾)이 상장의 발목을 잡았다. 파나시아는 아직도 상장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증시가 활황을 보였던 지난해에는 상장 철회를 한 곳이 거의 없지만 올해 들어서는 다시 상장 철회 기업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현대엔지니어링(1월), 보로노이(3월), SK쉴더스‧원스토어‧태림페이퍼(5월) 등이 올해 들어 상장을 철회한 곳이다. 구글이나 애플과 기업가치를 비교했던 원스토어, 기업가치를 동종업계 1위 기업보다 1조원이나 더 올려 상장하려 했던 SK쉴더스 등이 기관투자자의 외면에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현재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기업들 중에서도 기업가치 고평가 논란을 겪는 곳이 많다. 대표적인 곳은 국내 새벽배송 시장을 개척한 컬리(마켓컬리 운영사)다. 한 증권사는 컬리를 영국의 물류기업 오카도(OCADO)와 비교해 기업가치가 8조7000억원이 될 것으로 봤다. 8조7000억원은 유가증권시장 시총 47위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361610)(8조6983억원‧30일 종가 기준)와 비슷한 수준이다. 비상장주식 거래소에서 컬리의 시가총액은 3조원에 불과하다.

오카도는 영국에서 매장 없이 물류센터를 기반으로 온라인 식품‧식자재를 판매한다. 또 온라인마켓에서 주문에서 배송까지 전 과정을 관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SW)를 만들어 다른 유통기업에 제공하는 사업도 하고 있다. 미국의 크로거(Kroger), 캐나다 소베이(Sobeys) 등 각국 거대 소매업체들이 오카도 솔루션을 이용해 온라인 마켓을 운영하고 있다. 2020년 기준 매출액만 24억 파운드(약 3조8000억원)이고 지난해에는 27억 파운드(약 4조2730억원)의 매출을 거뒀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다. 매출 규모만 놓고 봐도 컬리(1조5613억원‧2021년말 기준)의 3배에 가까운 곳이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이런 기업가치에 대한 고평가가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기업가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는 상장 예정 기업도, 상장 주관 증권사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상장 예정 기업과 상장 주관 증권사는 본인들이 원하는 기업가치를 미리 정해놓고 그 기업가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비교기업이 어디인지를 찾는다는 것이 금융투자업계의 전언이다. 아예 기업이 상장 업무를 주관할 증권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자사의 기업가치를 더 높게 받아줄 수 있다고 발표하는 곳을 최우선 순위로 정해 딜(상장 주관 업무)을 맡긴다는 이야기도 있다.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상장 주관사 선정 프레젠테이션(PT)에서 딜을 따내기 위해 증권사들은 말도 안 되는 비교기업을 정해 기업가치를 높이겠다고 제시한다”며 “이렇게 거래를 따낸 후 실제 IPO 업무에 들어가서 현실에 맞춰 기업가치를 낮추려고 하면 이런 증권사는 소문이 나서 장사를 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PT에서 상장주관사가 되기 위해 기업가치를 높게 제시한 증권사는 기업가치가 시장의 평가보다 더 높음을 알고도 실제 IPO에서 공모가를 본인들이 PT에서 제시한 수준과 비슷한 쪽으로 맞출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만약 실제 IPO 과정에서 기업가치를 PT 당시보다 낮추면 다른 기업들은 이 증권사가 PT에서만 높은 기업가치를 제시하고 나중에 딴소리하는 곳으로 낙인을 찍어버려 상장 주관 업무를 맡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증권사들은 차라리 중간에 상장 철회를 하게 되더라도 공모가를 터무니없이 높게 제시하고 장밋빛 기업가치를 예비 상장 기업에 가져온다. 딜을 따내려는 증권사와 조금이라도 기업가치를 높이려는 기업의 협업 과정에서 상장 예비 기업의 몸값은 1년만에 프리IPO 당시보다 3배 이상 껑충되기도 한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구심을 갖게 되지만 구글이나 애플, 오카도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상장 예비 기업의 경쟁사가 되는 일도 발생한다.

유동성이 넘쳐나던 제로 금리 시대에는 돈이 갈 곳이 없었다. 상장을 준비하는 기업과 증권사들이 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고평가된 기업가치를 제시해도 상장은 성공했고 주가는 크게 올랐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각국이 금리 인상의 고삐를 죄고 있는 지금은 이런 식의 눈속임이 통할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공모 기업에 투자했다 투자금의 손실을 볼 가능성이 커져 투자자들이 눈을 크게 뜨고 기업가치를 냉정하게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을 대충 속여 상장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는 의미다. 긴축의 시대에 정말 자본시장에서 투자금을 수혈받고 싶은 기업이라면 본인들의 몸값을 제대로 측정해 투자자들을 만나길 바란다.

[시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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