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여한 독서] 인류의 미래는 출산이 아닌 돌봄에 있다
세라 블래퍼 허디 지음
유지현 옮김, 에이도스 펴냄
예전엔 인간이 뭇 동물과는 아주 다른 줄 알았다. 호모사피엔스라는 학명처럼 인간은 생각하는 슬기로운 존재이고, 두 발로 걷고 도구를 쓸 줄 알며 언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존재인 줄 알았다. 웃고 울고 고통을 느끼는 것, 심지어 자살하는 것조차 오직 인간만의 특별함이라 여겼다. 그래서 누가 못된 짓을 하면 짐승 같다느니 짐승만도 못하다느니 하고 욕했다. 요즘은 아니다. 동물에 관한 지식이 쌓이면서 동물도 도구를 쓸 줄 알고 기쁨과 슬픔,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며 때론 자살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가령 서아프리카 침팬지는 적어도 4300년 전부터 견과류를 까는 데 돌절구를 사용했고, 대형 유인원들은 “미래에 대비해” 도구를 챙기며, 다른 유인원들도 인간만큼 많은 걸 “기억”한다. ‘짐승의 썩은 고기만 찾아다니는 하이에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동물이었으나, 다큐멘터리에서 하이에나 어미가 위험에 빠진 딸을 대신해 사자에게 제 몸을 던지는 걸 본 뒤론 싫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는 사람이 동물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동물과 인간이 아무 차이가 없느냐면 그건 아니다. 모든 동물에겐 저마다 특질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게 뭘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특징, 인간이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성공적으로 번식할 수 있었던 진화의 비결은 무엇일까? 진화심리학에서는 ‘살인자 본능’ 같은 인간의 공격성과, 짝을 유혹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사회생물학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는 아이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런 경쟁과 투쟁은 “진화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갈등”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대신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협력적 본성, 독특한 협동 번식이다.
전작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와 〈어머니의 탄생〉에서 여성과 모성의 진화 전략을 새롭게 해석해 생물학에 만연한 남성 편향을 바로잡았던 허디는, 최근작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서 양육 방식을 주제로 또 한 번 진화론의 통념에 도전한다. 이제까지 사회생물학이나 경제학에선 인간 사회를 이기적인 ‘합리적 행위자’들의 경쟁터로 보았다. 유전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침팬지의 “악마적” 공격성은 이를 뒷받침하는 주요 근거였다. 그러나 허디는 다양한 영장류 실험과 아프리카 수렵채집민을 관찰한 연구를 토대로 이를 비판한다. 단적인 예로, 침팬지 같은 비인간 유인원 사이에선 호혜적 나눔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인간은 날 때부터 다른 사람과 연결되기를 원하며 일상적으로 가진 것을 나누고 선물한다. 한마디로 “공감과 마음 읽기의 결합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인간으로 진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인간 유인원도 싸우고 괴롭히고 경쟁하며, 잔인한 다툼의 흔적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가 많다. 유아 살해도 드물지 않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인간의 살인자 본능을 주장하지만 허디는 본능을 말하기 전에 먼저 질문한다. 이기적이고 호전적인 유인원들이 대다수였던 고대 아프리카 땅에서 어떻게 공감적이고 관대한 인간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공감 능력이 자연선택된 이유가 뭘까?
저자는 그 이유를 공동육아라는 현생 인류의 독특한 양육 조건에서 찾는다. 침팬지·고릴라·보노보 같은 유인원과 달리 인간은 어머니 혼자 아이를 키우지 않고 다양한 대행 부모들이 함께 돌봄 공유를 하는데 이 양육 방식이 성공적 진화의 원동력이란 것이다.
“그들이 여전히 인간일지 확실치 않다”
인간은 무기력하게 태어나 가장 긴 성장기를 거치는 동물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토록 비용이 많이 드는 아기를 낳는데도 유인원 중에서 인간의 출산 간격이 가장 짧다는 것. 이런 생식력이 가능한 건 할머니를 비롯한 대행 부모들이 어머니의 양육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원은 어머니와 아이의 육체적·정서적 안정을 이끌어 생존과 번식 가능성을 높인다(사회적 지원이 없을 때 유아 살해가 일어난다).
이와 관련해 허디는 교과서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냥꾼 남성-아이 돌보는 여성-그들의 아이’로 이루어진 원시 핵가족 모델은 19세기 가족관이 투영된 신화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인류의 선조인 진짜 홍적세 가족은 고정된 형태의 핵가족이 아니라 아이를 중심으로, 돌봄을 공유하는 남녀노소 여러 사람들이 함께하는 “편의적이고 유연한” 집단으로서, 부거제보다 모거제 사회가 더 어울린다(부거제는 신부가 가족을 떠나 신랑의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제도, 모거제는 신랑이 신부의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제도를 말한다).
인간 아기는 이런 돌봄 공유 사회에서 커다란 뇌를 가진 공감의 달인으로 자란다. 아기는 생후 1년쯤이면 타인의 감정을 읽는 것은 물론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심을 가진다. 다양한 양육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환경이 다른 영장류들과 달리 인간 아기의 초사회성과 공감 능력을 키워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모사피엔스의 진화를 이끈 양육 방식은 오늘날 위기에 직면했다. 핵가족과 어머니의 독점적 육아를 당연시하는 환경에서, 많은 어린이가 어른과 신뢰관계를 맺지 못한 채 성인이 된다. 그로 인한 후과는 심리적 불안에 그치지 않는다. 공동 돌봄이라는 조건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협력하는 인간의 진화를 이끌었다면, 이 조건이 사라지는 현 상황은 새로운 유인원의 진화로 이어질 것이다. 허디는 이 유인원이 현재의 인간보다 똑똑하고 경쟁적이며 기술적으로 뛰어날 거라고 전망한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관심과 공감이 인간의 특성이라면 “그들이 여전히 인간일지는 확실치 않다”라고 말한다.
아이를 안 낳는다고 걱정들을 하지만 태어난 아이가 인간으로 진화하지 않는다면 미래가 없기는 매한가지. 우리 종의 미래는 출생률이 아니라 돌봄 공유에 있다.
김이경(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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