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박물관이 들러리인가..시민 찬밥 만든 '외교만찬 악습'

노형석 2022. 5. 3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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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 문화재]
한미 정상회담 만찬 이유로
불과 며칠 전에야 휴관 지시
진행 전시들 중단돼 시민 항의
관람 10분뿐..총수들 만찬시간
문화기관, 행사의 들러리 불과
과거 정권의 망령 되살아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오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 앞서 신라 금관 등을 관람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기 한해 전인 2015년 10월27일, 국립현대미술관은 누리집에 황당한 공지문을 올렸다.

‘휴관 및 대체 개관 안내’라는 제목의 공지문은 당시 ‘올해의 작가상 2015’전이 열리고 있던 서울 소격동 서울관을 내부 사정으로 다음달 1일 하루 임시휴관하고 16일 대체 개관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미술관 상부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는 당시 11월1일까지 열릴 예정이던 ‘올해의 작가상 2015’전도 임시휴관에 따라 5일까지 연장 전시하는 일정으로 변경됐다고 알렸다.

‘내부 사정’은 당시 청와대의 요구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11월1일 열릴 한·중·일 정상회의 만찬 장소로 미술관을 내달라고 강권에 가까운 요구를 받은 문체부가 미술관을 압박해 전격적으로 휴관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그러니까 만찬 준비를 이유로 서울관 공식 전시 일정을 일방적으로 중단시키고 전시장도 폐관시킨 것이다. 문체부는 올해의 작가전도 청와대 일정을 내세워 하루 앞당겨 끝내려 했다. 일부 작가들은 원칙에 어긋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문체부는 미술관을 만찬장으로 쓴다는 사실을 사전에 충분히 양해를 구해 조율하지 않고 작가들에게 일방적으로 통고만 했다. 반발이 커지자 문체부는 부랴부랴 대체 개관과 전시 연장이라는 미봉책을 꺼내들었다. 당시 하태범 작가는 일방적인 전시 일정 변경에 항의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지만, 미술관 쪽이 ‘국가기밀 누설’이라며 삭제를 요구해 내리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 환영만찬 전에 문화재를 관람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장황하게 약 7년 전 만찬장 논란을 꺼낸 건 이유가 있다. 지난 21일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으뜸홀에서 진행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의 한-미 정상 만찬에서도 똑같은 양상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공개한 박물관 쪽 답변 자료에 따르면, 토요일 예정된 만찬 일정은 불과 3~4일 전 외교부에서 일방적으로 휴관해달라는 통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월요일인 16일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아무리 늘려 잡아도 5~6일 사이에 만찬장과 조리 공간, 두 정상의 동선 공간 확보 등이 다급하게 이뤄진 셈이다. 이 와중에 박물관은 만찬 3일 전인 18일에야 전시장을 휴관한다고 공지해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서구에선 박물관의 사교 무대 활용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관행이다. 숱한 외교 협상과 강화회의의 무대가 된 프랑스 베르사유궁, 오스트리아 쇤브룬궁 등이 보여주듯이 중세 이래로 왕궁과 귀족의 유물 명품 공간들은 외교 사교 공간으로 널리 쓰였다. 18~19세기 혁명 시기에도 시민 권력이 왕궁을 접수해 박물관으로 전용하면서 부르주아 시민 계층의 회합 공간으로 쓴 전통이 깊다. 미국과 유럽의 대형 미술관들은 운영 기금 확보를 위해 전시실을 포함한 넓은 공간을 대관하는 사례도 숱하다. 이사회 체제의 미술관들이 운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전시장을 연회 공간으로 종종 제공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은 일제강점기 시절 궁궐이 훼손돼 박람회장으로 전용되는 등 심각한 문화재 침탈을 당한 역사가 국민들의 집단 기억에 남아 있다. 만찬장 활용의 경우 명확하게 조건을 규정한 매뉴얼과 시민들의 동의가 필요할 것이다.

21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 환영만찬. 대통령실 제공

문제는 권력기관이 일방적으로 지시해 만찬 회합 장소를 급조하는 과거 정권 시절의 나쁜 버릇이 재발됐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 때도 2010년 G20 정상회의 만찬이나 2012년 영부인 김윤옥 여사가 주최한 핵안보회의 참석 국외 정상들의 영부인 만찬 장소로 국립중앙박물관을 정해 전시 유물까지 끌어오는 등 각가지 논란을 빚었다. 박근혜 정권 때도 이런 식의 일방적인 지시 관행으로 여론의 반발이 컸고, 박물관은 박물관대로 권위와 체통이 망가졌다. 이번에도 박물관은 똑같이 일방적으로 상부 지시에 굴종하며 공간을 내주어야 했다. ‘문화 외교’라는 수사를 썼지만, 그것도 불과 10분여 바이든 대통령이 1층 전시장의 금관과 경천사지석탑, 고려동종을 보면서 짧은 대화를 나누는 정도에 머물렀다. 박물관에서 보낸 만찬 시간의 대부분은 10대 그룹 총수들이 참여한 비즈니스 정상 외교였다. 총수들과의 만찬이 우선이었다. 박물관은 공간만 제공하고 반가사유상을 전시한 사유의 방 같은 문화유산의 진수를 제시간에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한 채 들러리로 전락했다는 말들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 환영만찬에서 건배하고 있다. 대통령실

문화재 동네에서는 최고 권력기관 청와대를 개방했다는 명분과 달리 자기네들 편의에 따라 문화기관을 행사의 들러리 세우는 현 정권의 이른바 ‘내로남불’식 행태에 더욱 눈총을 주고 있다.

박물관의 한 학예사가 말했다. “권력자들이 밥 먹는 장소로 쓰겠다고 통보하면 만사 제쳐놓고 순순히 내주는 게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달라고 하면 또 줄 겁니다. 대통령실이 바로 지척인데 그게 두렵습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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