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팝의 역사, 고고학 연구하듯 파고들었죠"

고경석 2022. 5. 3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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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전문가 세 필자 '한국 팝의 고고학' 3, 4권 펴내
2005년 초판 나온 1, 2권은 개정·증보해 재출간
대중음악의 역사를 장소와 접목해 재구성
25일 서울 마포구 을유문화사 사무실에서 만난 '한국 팝의 고고학' 저자 3인 신현준(왼쪽부터) 성공회대 교수, 김학선·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 1960년대, 1970년대를 각각 다룬 1, 2권에 이어 최근 1990년대까지 이야기하는 3, 4권을 펴낸 필자들은 "2000년대 이후는 한국 대중음악이 세계로 나아가기 때문에 더 이상 '한국 팝'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서 완간을 강조했다. 최주연 기자

한국 대중음악사의 바이블 또는 경전이라 할 만한 책이 최근 출간됐다. 총 4권, 2,600쪽에 이르는 역작 ‘한국 팝의 고고학’이다. 1960년부터 10년 단위로 묶인 책들 중 ‘1960 탄생과 혁명’과 ‘1970 절정과 분화’는 2005년 펴낸 초판을 개정, 증보한 것이고, ‘1980 욕망의 장소’ ‘1990 상상과 우상’은 처음으로 낸 책이다. 앞서 나온 2권은 대중음악 전문가나 애호가들 사이에서 고전으로 통하며 절판 후 중고가격이 몇 배씩 뛰기도 했다.

‘한국 팝의 고고학’은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와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가 주도해 1, 2권이 나왔고 이후 김학선 평론가가 합류하면서 3, 4권이 완성됐다. 20여 년의 조사와 연구, 아카이브 작업을 거친 이 역작에 벌써부터 찬사가 쏟아지고 있고 2000년대를 다룬 책은 언제쯤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이 쏟아진다. 25일 서울 마포구 을유문화사 사무실에서 만난 신 교수는 “2000년대 이후는 ‘한국 팝’이 아니라 디지털 글로벌 시대의 음악이기에 이 책은 1990년대로 끝”이라면서 “21세기의 음악에 대해선 젊은 평론가, 연구가들이 써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공동 저자인 최지선 김학선 평론가도 함께했다.

‘한국 팝의 고고학’은 단순히 신중현에서 조용필, 조동진, 신해철, 서태지, H.O.T.로 이어지는 히트곡, 인기가수의 연대기도, 한국 가요사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한 책도 아니다. 명반과 이를 만든 창작자를 호명하며 한국 대중음악사의 빛나는 순간을 조명하는 책 또한 아니다. 신 교수는 “신화화나 미화하는 작업을 배제하고 담담한 기술을 담으려 했다는 점에서 고고학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담담하면서도 때로 지나치리만큼 상세한 기술은 당시 현장을 직접 관찰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안긴다.

17년 만에 나온 3, 4권의 가장 큰 특징은 음악이 만들어지고 매개되는 여러 장소의 연결과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 팝의 역사를 짚는다는 점이다. 단절된 점과 선을 이어 붙여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음악 ‘신(Scene·유사한 성격과 지리적 배경 등을 공유하는 음악 창작자들 집단)’에 구체적 공간을 접착해 3차원의 건축물을 만든 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런 신들이 어떻게 연결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지 서술한다는 점에서 여타 대중음악사 서적과 큰 차이가 있다. 이 같은 차이는 “대중음악이 생산되고 매개되는 공간적 구조는 이질적이고 그 시간의 흐름은 불연속적”이라고 보는 저자들의 견해에서 나왔다.

새로운 서술이 시작되는 3권 1980년대의 부제는 ‘욕망의 장소’다. 최지선 평론가는 “장소가 특정 동이나 구를 가리키는 건 아니고 음악인들과 그와 관련된 산업 또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또 어떻게 이동했는가를 보려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 명동과 종로, 충무로 인근에 언론사와 방송사는 물론 음반사, 라이브 카페까지 모여 있던 1970년대와 달리 조용필이 본격 스타덤에 오른 1980년대는 서로 다른 욕망에 따라 장소들이 분화하기 시작됐다. 방송사들은 여의도로 옮겨갔고, 정부의 강남(당시엔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뜻의 영동으로 불림) 개발 정책에 따라 나이트클럽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가수들의 공연 수입 터전이 되는 라이브 무대도 강남으로 대거 이동했다. 기획사와 음반사도 속속 강남에 자리를 잡았다.

1980년대 방배동 카페골목 약도. 이주호의 해바라기는 '화려한 목요일'에서 노래했다. 을유문화사 제공

시차를 두고 이태원(DJ와 댄스가수들), 신촌(엄인호 김현식 이정선 등), 방배동(발라드 가수들), 대학로(동물원, 김광석 등), 낙원동과 잠실(헤비메탈 밴드들) 등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했했다. 특히 이주호 강인원 조덕배 김종찬 변진섭 등 발라드 가수들과 하광훈 박주연 지예 이호준 등 작사·작곡가가 활약했던 1980년대 방배동 카페골목의 역동적 풍경을 약도까지 첨부해 설명한 대목은 흥미진진하다.

1990년대는 “모든 것이 경계를 넘어 흘러 다닌다는 상상력으로 가득 찬 시대”였다. 숭배의 대상을 찾아 우상의 제단을 쌓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1990년대의 부제는 ‘상상과 우상’이다. "압구정동에는 음악이 없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1990년대는 댄스, 록, 발라드, 아이돌, 힙합, 인디 록 등 좀 더 다양하고 세분화한 장르가 전개된다. 김학선 평론가는 “4권에선 장소보다 장르를 중심으로 서술하면서 서태지 김건모 같은 슈퍼스타뿐 아니라 김창환 천성일 김우진 유대영 등 그 장르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려 했다”고 부연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편에선 이처럼 다양한 장소에서 여러 장르의 음악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당시 음악 산업의 지형도, 엔터테인먼트 소비 문화, 창작자와 산업 관계자들의 연결 등을 통해 입체적·동적·유기적으로 재구성한다. 한영애 나미 전인권 김완선 신해철 등 유명 가수들뿐만 아니라 방송사 PD 진필홍, 작곡가 이범희, DJ 출신 제작자 최민혁, 가수 출신으로 이수만과 함께 SM엔터테인먼트의 초기 핵심 인물로 활약한 홍종화 등 대중음악산업의 숨은 실력자들과 나눈 인터뷰도 담았다.

1980년대 가수 조동진(오른쪽)이 살던 서울 서초동 은하아파트에서 찍은 사진. 왼쪽은 조동진의 오랜 벗 조원익. '한국 팝의 고고학'에는 이처럼 귀한 자료 사진도 다수 수록했다. 을유문화사·조동희 제공

기획·제작자와 매니저, 작곡가들을 따라가면 전혀 뜻밖의 인물들이 연결되기도 한다. 일례로 하춘화쇼의 단장이었던 최봉호가 이끌던 삼호프로덕션 소속 가수 나미의 매니저였던 이상석이 훗날 제작자로 변신해 룰라를 스타로 만드는 식이다. ‘방탄소년단의 아버지’ 방시혁이 조동진의 영향을 받은 작곡가 김형석에게 작곡을 배운 박진영에게서 “프로듀싱의 A부터 Z까지 배웠다”고 말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온 한국 팝의 역사는 유무형의 유산을 통해 현재의 K팝으로 이어진다. 한국 대중음악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신 교수는 세 가지 요소로 압축했다.

“1990년대까지 일본 대중음악의 국내 시장 진입을 막은 결과 모방을 하든 표절을 하든 알 수가 없었어요. 또 하나는 화교 출신인 왕배영 록레코드 사장이 대만과 홍콩 등에 한국 대중음악을 알린 것. 마지막으로는 음반사가 아닌 매니지먼트 중심으로 대중음악 산업이 펼쳐졌다는 점입니다. 가수가 매니저를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매니저가 가수를 고용하는 방식의 매니지먼트형 기획사는 사실상 최봉호의 삼호프로덕션에서 시작됐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훗날 SM은 이 같은 매니지먼트뿐만 아니라 레코딩까지 장악하면서 세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거죠.”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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