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별명과 왕따

김태훈 논설위원 2022. 5. 31.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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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골딩의 장편 ‘파리대왕’은 아이들만 태운 비행기가 무인도에 불시착한 뒤 섬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다룬다. 모든 소년이 서로 이름을 부르지만, 뚱뚱하고 행동 굼뜬 한 소년만은 돼지라는 뜻의 별명 ‘피기’로 불린다. 이 별명이 사악한 힘을 발휘한다. 별명 부르기가 거듭될수록 소년들은 피기가 자기들과 같은 인간이란 사실을 잊어간다. 왕따가 된 피기는 무리 밖으로 내쳐져 죽는다. 1950년대 소설이지만, 왕따가 인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내다본 작품이다.

▶별명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고 보는 전통 유교 사회에선 타인을 존중하는 뜻으로 별칭인 자(字)와 호(號)를 썼다. 유교 성인식인 관례 때 받아 평생 쓰는 자(字)보다는 성격, 취미 등을 반영해 스스로 짓거나 지인이 지어주는 호(號)가 오늘날 별명에 더 가깝다. 친구면 “여보게, 율곡”, 후학이면 “율곡 선생님” 했다. 사임당 신씨처럼 거처 이름인 당호(堂號)를 가져다 쓰기도 했다. 인터넷 아이디(ID)도 현대판 당호라 할 수 있다.

▶로마 제국 기틀을 다진 카이사르가 별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카르타고의 코끼리 부대를 무찌른 카이사르의 조상이 코끼리라는 뜻의 카르타고어인 ‘카이사이’를 별명으로 얻은 게 성(姓)이 됐다고 한다. 별명이 본명보다 유명한 사례도 있다. 야구왕 베이브 루스의 본명은 조지 허먼 루스, 농구 스타 매직 존슨 본명은 어빙 존슨이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별명을 정적 조롱하는 데 썼다. 연로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슬리피 조’, 단신인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 시장은 ‘미니 마이크’라고 불렀다.

▶일본에서 별명을 금지하고 이름 뒤에 우리의 씨(氏)에 해당하는 상(さん)을 붙여 부르게 하는 초등학교가 늘고 있다. 교토 공립 초등학교 160곳 중 절반 넘게 ‘상’을 의무화했다고 한다. 별명이 친구를 놀리는 데 쓰여 왕따를 초래한다는 이유에서다. 일부 직장에서 경직된 상하 관계를 허물자며 ‘상무’ ‘부장’ 등 직책이 아닌 ‘상’으로 통일했는데, 이를 학교에서 왕따 퇴치용으로 도입했다고 한다.

▶왕따의 폐해가 심각하다. 사회적으로 파문당한 것과 같은 왕따는 스트레스 대응 능력이 미숙한 청소년에게 감당 못할 충격이 된다. 가해자를 엄벌하는 게 능사도 아니다.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이 어린 시절 친구를 괴롭혔던 일로 활동을 접는 것도 안타깝다. 어려서부터 서로 존중하는 언어 습관을 갖도록 유도해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는 사례를 참고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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