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당신은 어디에 '시민의 권력'을 쓸 것인가
고발과 폭로는 어렵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더 어렵다. 그러나 온 사회가 노력한다면 결국 문제는 해결된다. 이달 18일에 넷플릭스가 공개한 다큐멘터리 <사이버 지옥 : n번방을 무너뜨려라>는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n번방 문제가 처음에 어떻게 고발되었고, 그 전모가 어떻게 폭로되었으며, 어떻게 해결될 수 있었나. 영화는 이 질문 흐름을 큰 줄기 삼아 전개된다.
제보가 있었다. 텔레그램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고. 제보를 받은 한겨레신문 기자들은 취재를 시작하고 기사를 냈다. 한국이 이미 ‘성범죄 공화국’이기 때문일까. 큰 반향이 없었다. 이때 시민들이 나섰다. SNS에서 n번방 수사를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였고,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이슈를 띄웠다. 이를 통해 SBS와 JTBC의 시사프로그램 PD들이 n번방 사건을 알게 된다. 이들이 각자의 전문성과 관점으로 취재를 시작해 새로운 정보를 폭로함으로써 n번방의 ‘빈 고리’를 채웠다. 한겨레신문보다 조금 앞선 시기, 대학생 기자단 ‘추적단 불꽃’도 n번방을 쫓고 있었다. 가해자들이 빠져갈 구멍이 없도록 장시간 취재하는 한편, 취재를 통해 얻은 자료를 경찰에 제공하며 수사망을 좁혀갔다. 그렇게 ‘박사’와 ‘갓갓’이 잡혔다. 시민들은 강력처벌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국회에서는 ‘n번방 방지법’이 제정됐다.
제보자 시민과 언론, 시민들과 또 다른 언론들과 경찰, 다시 시민들과 정치. n번방 사건은 한 사회를 이루는 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한 결과들의 집합으로 마침내 해결될 수 있었다. 최진성 감독이 주목한 것도 이 부분이었다.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우연치 않게 지옥도를 만나고 소용돌이에 말려든 이들의 고군분투를 연결해보니 결국 보이지 않는 연대를 통해 범인을 잡은 거였다.” 보이지 않는 연대. 사건을 최초로 보도했던 김완 기자는 “이어달리기”라고도 했다. 뭐라 표현하든, 그 중간고리를 단단하게 채운 것이 시민들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시민들의 분노와 운동이 없었다면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는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문제 해결은 이토록 어려운데 가해는 너무나도 쉽다. 해결이 ‘보이지 않는 연대’로 가능하다면, 가해도 ‘보이지 않는 방조’로 가능하다.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과 수요를 충족해주는 이들뿐만 아니라, 단지 이 사회에 존재할 뿐인 이들도 부지불식간에 가해의 공모자가 된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의 말이 이 점을 설명한다.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바로 이 폭력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n번방 피해자들이 피해를 제때 알리지 못하고 착취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을 때 돌아올 반응과 시선들이 결코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부모에게조차.
가해자는 어떻게든 잡힌다. 영상을 구매한 자들도 잡을 수는 있다. 그러나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잡을 방법이 없다. 그것은 이 사회의 구조 자체이기 때문이다. 한 사회 구조에서 평균적 인식을 가진 자들을 모두 잡아넣도록 허용하는 법 같은 건 없다. 이런 점에서 이 다큐멘터리를 극악한 범죄자들을 고발하고 체포하는 정의로운 이야기로만 받아들이면 충분치 못한 관람이다. 이 사건의 발생과 해결 과정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정확한 관람이다.
‘모든 권력은 주권자인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오늘날 웃음거리가 됐지만, 그 우습고 추상적인 말이 이렇게 구체적인 사건으로 재확인되는 때가 있다. 분명히 우리에겐 권력이 있다. 살리는 권력도, 죽이는 권력도 모두 우리에게 있다. 당신은 어디에 그 권력을 쓸 것인가.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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