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서울 도심의 사람살이 향기
나무가 처한 사정보다 늘 사람의 사정을 앞세우는 서울 한복판에서 사람살이의 향기를 오래 간직하고 수굿이 살아남은 측백나무가 있다. 강서구 화곡동 마을 쉼터를 지키고 서 있는 나무다. 쉼터는 600㎡가량의 옹색한 공간이지만, ‘측백나무가 반겨주는 지정 보호수 마을 마당’이라는 근사한 표지판이 나무의 존재감을 남다르게 한다.
다닥다닥 이어지는 다세대주택 건물들 사이에 마련한 쉼터로 이어지는 조붓한 골목은 ‘곰달래길’ 구간의 일부로, 예전에 ‘용암길’로 불리던 길이다. 길 이름에 든 ‘용암(龍巖)’은 이곳에서 마을 살림살이를 지혜롭게 이끌어온 선조 김팽수(金彭壽)의 아호다. 영해도호부사를 지낸 그는 성품이 후덕하고 행동거지가 분명하여 ‘도덕군자’로 불렸다. 그는 늙마에 조상의 음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원주김씨의 시조인 김거공(金巨公)의 탄생일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후손의 번창을 기원했다. 바로 ‘서울 화곡동 측백나무’다. 더불어 그는 이때의 사정을 ‘식수기(植樹記)’로 상세히 남겼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록은 임진왜란 때 모두 잃었다.
도덕군자가 심은 나무라는 뜻을 지키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이 측백나무를 ‘군자수’로 부르며 정성껏 돌봤고, 나무는 사람의 뜻을 담고 도담도담 자라나 마을의 상징이 됐다. 500년 가까이 살아오며 나뭇가지가 부러지거나 썩어 문드러지며 발생한 공동이 적지 않지만, 외과수술을 거쳐 지금의 생육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건강하다.
마침내 이 나무는 높이 17m, 가슴높이 줄기둘레 2.7m의 크고 아름다운 측백나무로 우뚝 섰다. 무엇보다 비좁은 골목길에 촘촘히 들어선 다세대주택 건물들 위로 우뚝 솟아오른 자태가 바라보는 사람을 한눈에 압도한다. 사람의 향기를 간직하고 사람의 극진한 보호를 받으며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측백나무’ 가운데 하나로 꼽을 큰 나무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나무를 오래 지켜온 사람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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