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모두의 안녕
한번 건너오면 돌아갈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오랫동안 ‘세월’이란 말을 쓰지 못했다. ‘골든타임’이란 단어도 다른 표현을 찾아야 했다. 어떤 말을 특정 사건이 독점할 순 없지만, 단어에 달라붙은 경험과 기억은 언어생활을 바꿔놓았다. 언젠가 세월이라는 말도, 골든타임이라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쓸 날이 올까. 그렇게 된다면 무던해진 스스로를 조금 미워하게 될 것 같다. 벌써 잊었냐고.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지하철역사도 어떤 이들에겐 공포스러운 공간이자 투쟁의 대상이다. 2001년 4호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부부가 리프트 사고로 숨졌다. 지난 4월에도 9호선 양천향교역에서 한 장애인이 비슷한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20년이 지나 서울지하철이 9호선까지 만들어지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지하철을 타려다 죽고, 지하철을 타게 해달라고 울부짖는다. 6년 전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하청업체 직원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구의역은 거대한 추모의 공간이 됐다.
지난 22일 공중파 방송이 청와대 개방을 기념하는 음악회를 열었고,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청와대 공간은 아주 잘 조성된 멋진 공원이고 문화재”라며 “무엇보다 국민 여러분의 것”이라고 말했다. 그 화려한 ‘쇼’에 실소가 나왔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차별금지법 입법을 촉구하며 사람들이 단식을 하고 있었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활동가들은 바닥을 온몸으로 기고 삭발 투쟁을 했다. 새 정부가 시민들에게 돌려줄 것이 고작 청와대 부지인 것일까. 우리가 돌려받아야 할 것은 멋진 공원처럼 조성되고 문화재 같은 청와대 부지가 아니라, 문밖의 차별 없는 세상이 아닌가. 전장연은 “새 정부의 첫 추가경정예산 중 장애인권리 예산은 0원”이라며 장애인 예산을 반영해달라고 촉구했지만, 29일 여야가 합의한 62조원대 추경에도 이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22년의 지구별을 공유하는 우리는 각자 다른 단어와 장소, 기억에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에겐 언제라도 돌아가고 싶은 학교가 누군가에겐 잠시라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공포스러운 공간일 수 있다. 이별의 상처를 안고 있는 이에겐 상대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물건이, 어떤 냄새가 그럴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켜켜이 자신만의 상처를 쌓고 기억하고 다음의 단계로 어렵게 넘어가는 과정 같다. 어떤 말을 편하게 쓸 수 없는 세계로 건너왔지만, 그렇다고 삶이 끝나지는 않는 것처럼. 나에게 쓰라린 대상이라고 해서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다름과 무심함은 절망을 불러일으킨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 것이다”라고 썼다. 우리는 어쩌다 사람을 사람으로 환대할 권리를 정치인들에게 주게 되었을까.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장애인들은 투표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 실패한 정치는 사람을 죽인다. 변희수씨와 김기홍씨의 죽음과 줄지 않는 산재사망자 수에서 “당신들은 그래도 돼”라고 말하며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무시하는 세계를 본다. 이런 세계에서 무사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모두의 안녕을 빈다.
장은교 소통·젠더데스크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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