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묘소 지켜달라".. 일제하 민초들, 끼니 굶고 모은 돈 보냈다
이소연 기자 2022. 5. 3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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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드신 충무공의 위토(位土·묘소 관리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토지)가 경매된다는 소리를 듣고 밥 지을 때마다 쌀 한 홉씩을 덜어 돈으로 보냅니다.' 1931년 6월 8일 일본 오사카에 살던 해외동포 서소선 박순이 양이 동아일보에 보낸 편지글이다.
이듬해 5월 13일 동아일보는 '2000원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의 묘소 위토' 제목의 기사를 후속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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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충무공 유적보존회' 기록물
성금편지 등 4254점 문화재 등록 예고
성금편지 등 4254점 문화재 등록 예고
‘거북선을 만드신 충무공의 위토(位土·묘소 관리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토지)가 경매된다는 소리를 듣고 밥 지을 때마다 쌀 한 홉씩을 덜어 돈으로 보냅니다.’
1931년 6월 8일 일본 오사카에 살던 해외동포 서소선 박순이 양이 동아일보에 보낸 편지글이다. 친구 사이인 두 소녀는 ‘굶주리더라도 일주일 동안 모은 돈을 넣었다’는 글과 함께 현금 50전을 보냈다. 일제강점기 충무공 후손의 부채로 경매 위기에 처한 위토를 지켜낸 이들은 먹을 것을 아껴가며 십시일반 성금에 참여한 민초들이었다.
문화재청은 1931, 1932년 동아일보가 주도한 ‘이충무공 유적보존회’ 기록물 4254점을 국가등록문화재로 30일 등록 예고했다. 기록물은 성금을 보낸 이들의 편지 2609점과 유적보존회의 성금결산 및 지출장이다.
충무공 위토 경매사건은 1930년 9월 20일 동아일보의 단독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충무공 13대 종손 이종옥 씨가 충남 아산 음봉면의 충무공 위토를 담보로 빚을 진 것. 이듬해 5월 13일 동아일보는 ‘2000원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의 묘소 위토’ 제목의 기사를 후속 보도했다. 이 씨가 빚을 갚지 못해 위토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놓인 것이다. 다음 날 독립운동가로 동아일보 논설위원이던 위당 정인보(1893∼1950)가 “충무공 묘소와 위토를 보존하는 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책임”이라고 호소하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위당의 사설은 민족의 마음을 움직였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빈부와 국경을 초월해 “충무공 위토를 지켜 달라”는 편지와 더불어 독자들이 동아일보에 성금을 보내왔다. 후속 보도가 나간 다음 날 최태식 씨 등 5명이 ‘우리들의 주머니를 긁어모아 충무공 묘소와 위토를 찾자’는 편지와 더불어 5원을 보낸 게 시작이었다. 첫 보도 후 열흘 만에 모인 성금이 1578원13전. 성금 장부에 따르면 1931년 5월 16일부터 이듬해 6월 5일까지 약 2만 명, 400여 개 단체가 총 1만6021원30전을 모았다. 현재 화폐가치로 약 10억 원에 달하는 돈이다.
1931년 6월 8일 일본 오사카에 살던 해외동포 서소선 박순이 양이 동아일보에 보낸 편지글이다. 친구 사이인 두 소녀는 ‘굶주리더라도 일주일 동안 모은 돈을 넣었다’는 글과 함께 현금 50전을 보냈다. 일제강점기 충무공 후손의 부채로 경매 위기에 처한 위토를 지켜낸 이들은 먹을 것을 아껴가며 십시일반 성금에 참여한 민초들이었다.
문화재청은 1931, 1932년 동아일보가 주도한 ‘이충무공 유적보존회’ 기록물 4254점을 국가등록문화재로 30일 등록 예고했다. 기록물은 성금을 보낸 이들의 편지 2609점과 유적보존회의 성금결산 및 지출장이다.
충무공 위토 경매사건은 1930년 9월 20일 동아일보의 단독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충무공 13대 종손 이종옥 씨가 충남 아산 음봉면의 충무공 위토를 담보로 빚을 진 것. 이듬해 5월 13일 동아일보는 ‘2000원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의 묘소 위토’ 제목의 기사를 후속 보도했다. 이 씨가 빚을 갚지 못해 위토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놓인 것이다. 다음 날 독립운동가로 동아일보 논설위원이던 위당 정인보(1893∼1950)가 “충무공 묘소와 위토를 보존하는 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책임”이라고 호소하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위당의 사설은 민족의 마음을 움직였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빈부와 국경을 초월해 “충무공 위토를 지켜 달라”는 편지와 더불어 독자들이 동아일보에 성금을 보내왔다. 후속 보도가 나간 다음 날 최태식 씨 등 5명이 ‘우리들의 주머니를 긁어모아 충무공 묘소와 위토를 찾자’는 편지와 더불어 5원을 보낸 게 시작이었다. 첫 보도 후 열흘 만에 모인 성금이 1578원13전. 성금 장부에 따르면 1931년 5월 16일부터 이듬해 6월 5일까지 약 2만 명, 400여 개 단체가 총 1만6021원30전을 모았다. 현재 화폐가치로 약 10억 원에 달하는 돈이다.
동봉된 편지에는 끼니를 굶더라도 돈을 보낸 이들의 절절한 사연이 담겼다. 1931년 충남 아산 둔포에 살던 김동섭 씨의 편지에는 ‘세파에 시달리는 가냘프고 약한 몸은 1원의 여유도 없어서 50전의 피 같은 돈으로 백의동포의 핏줄을 잇고자 한다’고 적혀 있다. 평양의 부녀연합 기독병원 간호부 40명은 점심 한 끼를 굶고 모은 성금 11원70전을 보탰다. 자신을 일곱 식구의 가장이라고 소개한 최성엽 씨는 1931년 6월 1일 편지에 ‘일곱 가족의 생활도 겨우 영위하는 빈민입니다. 그러나 저는 백의민족의 혼을 타고 났습니다. 근근한 자산 중 피 같은 돈을 바칩니다’라고 썼다.
헌신적인 모금 운동 덕에 유적보존회는 1931년 6월 11일 2272원22전을 주고 은행으로부터 충무공 위토를 되찾았다. 남은 돈으로는 충무공의 유지를 보전하기 위해 1932년 충남 아산 백암리 충무공 고택 옆 현충사를 중건했다. 조선 숙종 때인 1706년 설립된 뒤 1868년 대원군 때 철폐된 현충사가 60여 년 만에 중건된 것이다. 현충사는 1967년 3월 사적으로 지정됐다.
헌신적인 모금 운동 덕에 유적보존회는 1931년 6월 11일 2272원22전을 주고 은행으로부터 충무공 위토를 되찾았다. 남은 돈으로는 충무공의 유지를 보전하기 위해 1932년 충남 아산 백암리 충무공 고택 옆 현충사를 중건했다. 조선 숙종 때인 1706년 설립된 뒤 1868년 대원군 때 철폐된 현충사가 60여 년 만에 중건된 것이다. 현충사는 1967년 3월 사적으로 지정됐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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