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새의 선물' 100쇄, 사과꽃 향기도 한몫
소설가 은희경의 첫 장편 ‘새의 선물’이 이달 100쇄를 찍었다. 1995년 첫 출간한지 27년만이다. 작가가 그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이중주’가 당선돼 등단한 직후, 산사에 틀어박혀 두 달 만에 ‘새의 선물’을 썼다고 한다.
100쇄는 단일 책을 출간 이후 모두 100번 인쇄했다는 뜻으로, 그만큼 작품이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다. “문학 작품의 100쇄는 영화로 따지면 1000만 관객 그 이상의 의미”라고 하니 대단한 기록이다.
100쇄를 넘긴 문학 작품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2017년 300쇄를 찍은 것을 비롯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최인훈의 ‘광장’, 박경리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아리랑’,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김훈의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등 모두 기라성 같은 작품들이다. ‘새의 선물’이 이 소설들에 버금가는 사랑을 받은 것이다.
‘새의 선물’은 ‘열두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조숙한 소녀 진희가 주인공이자 화자인 성장소설이다. 1969년 남도의 지방 소읍을 배경으로, 열두살 소녀의 눈으로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담았다. 외할머니 슬하에서 이모, 삼촌과 함께 사는 진희는 삶의 이면을 볼 줄 아는 조숙한 소녀다. 활동 반경이 기껏해야 우물을 중심으로 두 채의 살림집과 가게채로 이루어진 ‘감나무집’, 학교와 읍내의 ‘성안’ 정도가 전부지만,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자신이 ‘바라보는 나’를 분리하면서 빠른 눈치로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다. 이 책 뒷면에 ‘생의 진실에 던지는 가차없는 시선!’이라고 써놓았는데, 이 소설 특징을 잘 잡아낸 문구 같다.
나오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어린 시절 한번쯤 본듯한 사람들이다. 철없지만 순수한 이모, ‘밤에 돌아다니는 계집들은 사내들한테 익혀놓은 음식’이라고 딸 단속하는 할머니, 외아들만 믿고 사는 과부 장군이 엄마, 바람둥이 광진테라 아저씨, 착하고 인정 많은 광진테라 아줌마, 이모를 짝사랑하는 순정파 깡패 홍기웅...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개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특히 이모에 대한 묘사가 해학적이다. ‘물에서 씻어 막 건져낸 자두처럼 싱싱’하지만, ‘스무살을 어디로 다 먹었는지 어른스러운 모습을 느낄 수가 없는’ 인물이다. 이모는 삼촌의 서울 친구인 허석을 놓고 열두살 진희와 연적 관계를 이룬다. 허석이 서울에서 내려왔을 때 가족들은 밤 영화를 본 다음 과수원길로 산책을 간다. 이 대목에 사과꽃 향기가 나온다.
<가슴이 설레는 걸 보면 진정 나는 사랑에 빠진 모양이다. 과수원이 가까워질수록 꽃향기가 진해진다. 사과꽃 냄새다. 삼촌과 허석이 앞서서 걷고 그 뒤를 나와 이모가 따라간다. 어두운 숲길에는 정적이 깃들어 있고 사과꽃 향기와 풀벌레 소리, 그리고 하늘에는 별도 있다. (중략) 나에게 느껴지는 것은 다만 허석, 그와 밤 숲길과 사과꽃 향기뿐이다. 사과꽃 향기에 쌓여 그와 내가 봄 숲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과나무꽃은 황혼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남자의 실루엣과 함께 이 소설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나’는 허석이 그리우면 8월의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풋사과가 매달린 과수원길을 한없이 걷는다. 풋사랑이라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과일꽃이 사랑의 상징으로 쓰인 점이 특이하다. 사과꽃은 하얀 5장의 꽃잎에 황금색 꽃술이 달린다. 꽃봉오리는 처음에는 분홍색을 띠다가 활짝 피면서 흰색으로 변하는데, 분홍색이 아직 남아있을 때 사과꽃은 수줍은 아가씨의 볼을 연상시킨다. 사과꽃 향기는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잘 익은 사과가 가득 담긴 박스를 처음 개봉할 때 나는 냄새와 비슷하다. ‘새의 선물’이 100쇄를 찍을 정도로 사랑을 받는데 맑고 시큼한 사과꽃 향기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새의 선물’이라는 제목이 특이하지만 소설에 새는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소설 제목은 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책 맨 앞에 소개해놓은 그 시를 읽어보아도 소설과 연관성을 이해하기 어렵다. 작가는 한 강연에서 “가끔 소설 제목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제목이 소설 내용과 동떨어져)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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