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매력적인 권력자가 축출되는 과정

2022. 5. 30.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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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외치며 편가르고 세 결집
팬덤의 이면엔 혐오·폭력 있어
작은 실수 하나로 나락에 빠져
윤리 기반한 소명 의식 필요해

정의의 반대는 혐오가 아니다. 오히려 둘은 같은 선상에 있다. 혐오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나는 옳고 너는 사악하다는 이분법이 정의와 혐오를 동시에 과열시킨다. 과열된 정의는 이미 정의가 아니다. 정의는 함부로 말해져서도, 상대편을 누르기 위한 전략적 용어로 사용돼서도 안 된다. ‘정의’라는 테제를 거는 순간, 상대편의 안티테제 또한 ‘정의’가 되고 결국 상호 무한복제하는 미러링이 시작된다.

‘진정성’, ‘진짜’라는 말도 위험하다. ‘나의 진정성’은 상대의 작위성을 전제한 말이고, ‘나는 진짜다’라는 선언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가짜로 몰아넣는다. 진정성, 진짜를 부르짖는 정권은 성공하지 못한다. 나만 진정성이 있고 나만 진짜라는 인식이 이분법을 낳고, 결국 국민을 분열시킨다. 우리는 지난 정권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한귀은 국립경상대 교수·작가
이번 정권에도 ‘진정성’과 ‘진짜’를 역설하는 장관이 있었다. 진영은 다르고, 언어는 같다. 세련된 언어는 그 세련미 때문에 더 공격적으로 들리고, 정돈된 어조와 태도는 그 때문에 더 새로운 전사의 탄생처럼 보인다. 그의 적은 허위와 부패라고 하니 대중의 팬덤은 더 고조된다. 팬덤과 추앙의 이면에는 혐오와 폭력이 드리워져 있다. 기시감이 느껴진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은 팬덤과 혐오, 반지성 현상에 유용하게 적용된다. 우리의 욕망은 자생적이지 않고 매개자로부터 모방된 것이다. 상징자본·문화자본·매력자본을 가진 권력자는 욕망의 매개자로 등극한다. 그 권력자가 온갖 매체에 도배되듯 등장하면 대중과 그 권력자(매개자)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좁아진다. 권력자는 더 큰 권력과 찬양을 얻기 위해 대중을 모방하고, 대중은 그 매력에 더 집착한다. 이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약간의 스캔들이라도 발생하면 비난과 증오가 폭발적으로 과격화한다. 권력자에 대한 신비는 벗겨지고 대중은 욕망의 또 다른 매개자를 접수하게 된다. 이것이 팬덤에 기반을 둔 매력적인 권력자가 축출되는 과정이다.

권력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면 그에게는 매력과 스캔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캔들이 없다면 권력은 유지되겠지만, 그 어원 ‘스칸달론(scandalon)’이 암시하듯 스캔들은 누구나 걸려 넘어질 수 있는 덫이자 돌부리 같은 것이다. 누구라도 권력의 자리에 오르면 실수를 범하고 함정에 빠지거나 추문에 휩싸이기 쉽다는 뜻이다.

왜 대중은 지속적으로 매력적인 욕망의 매개자를 필요로 할까. 대중이 욕망하는 것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 매력적인 매개자가 추방되는 걸까. 역시 대중이 욕망하는 것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같은 것을 욕망한다. 자크 라캉의 말대로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결국 혐오와 비난과 증오는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 욕망의 삼각형에서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는 이유는 차이 때문이 아니라 차이의 소멸 때문이다.

법이 아니라 윤리가 절실한 이유다. 권력자가 반윤리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 법이다. 스캔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권력자는 법을 사용한다. 법의 인플레이션이 권력자에 의해 발생한다.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이 얼마나 평등하게 작동할까. 일반 국민이 쓰면 공허한 말이 된다. 법을 모르는 자에게 법이 평등할 리 없다. 법을 아는 자만이 법질서에 대한 강박을 키워서 그 법제적 초의식으로 오히려 국민을 강제한다.

우리는 법을 이용해 합법적인 반윤리가 행해지는 것을 목도했다. 권력의 영역에서는 법과 윤리가 반대말인 것처럼 보인다. 반윤리적인 권력자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법을 동원한다. 법 또한 권력자에 의해 사유화하는 것이다.

최근 또 한 명의 매력적인 권력자가 욕망의 삼각형에 오른 듯하다. 그는 자신이 비판했던 앞선 정치인과 짝패(double)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약 그 또한 팬덤이 만드는 환상에 길을 잃고 윤리를 간과한다면, 결국 자신이 비판했던 그 정치인과 공모한 셈이 된다. 두 진영 모두 합법적인 반윤리 국가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법이 아니라 윤리에 겸허하길 바란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합법적이었는지를 역설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국민의 윤리에 비춰 성찰하길 바란다. 매력적인 권력자의 지위에서 추방되지 않기 위해서도 윤리가 긴요하다. 권력자가 법에 호명된 것이 아니라 윤리로 소명됐을 때 그가 대중의 욕망이 난자한 자리에 있더라도 스캔들에 걸리지 않게 될 것이다.

정치권에서의 팬덤은 팬덤 그 자체에 의해 배반당한다. 팬덤의 한복판에 떠 있는 권력자는 이중구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 팬덤에 의지할 수도, 그것을 해체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팬덤이 시작될 때 팬덤과 무관하게 정치적 역능(力能)을 발휘하는 것, 지배하지 않는 역능을 실현시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정치인에게 바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 우리가 권력자에 대해 욕망의 삼각형을 짓지 않는 일이다. 지라르의 이론이 늘 옳은 것은 아님을 증명하는 일이다. 정치인이 어떤 가방을 들었건 이슈화하지 않는 것, 대통령 부인이 무슨 슬리퍼를 신었건 상관하지 않는 것, 그들의 가방과 슬리퍼가 솔드아웃 됐다는 뉴스에 더 이상 관심 두지 않는 것. 이것이 단지 ‘대중’이 아닌, ‘국민’으로서의 윤리일 것이다.

한귀은 국립경상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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