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옆을 볼 '자유'가 앞으로 나아갈 '용기' 준다

한겨레 2022. 5. 30.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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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학교·꿈틀리인생학교 가보니
꿈틀리인생학교의 글쓰기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고 느낀 점을 나누고 있다.

지난 23일 아침 인천 강화도에 위치한 ‘꿈틀리인생학교’의 글쓰기 수업 시간,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은 7명의 학생과 교사가 둘러앉아 서로 독후록 나누기를 시작했다.

“보통 다른 작법서에는 첫째, 둘째, 셋째 등의 글쓰기 원칙들을 알려주는데, 스티븐 킹은 ‘너의 느낌과 직관을 따르라’는 얘기를 반복적으로 하니까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과 불안감을 낮춰주더라고요.”

“저는 직관을 따르라는 말을 조금 비판적으로 봤는데요. 스티븐 킹은 글쓰기 재능이 있으니까 자신의 직관을 따라도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직관을 따르는 걸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요. 또 부사나 수동태를 쓰지 말라고 하는 등 간결한 글쓰기를 강조하는데, 부사나 수동태를 많이 쓰는 게 하나의 글쓰기 스타일이 될 순 없을까 하는 질문도 생겼어요.”

“저는 일본의 다자이 오사무 작가의 작품을 좋아했는데, 이 작가의 작품은 당시의 시대상이나 분위기를 담고 있어서 그런지 문장에 부사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하지 말라는 수동태도 많이 나오고 쉼표도 굉장히 많이 나와요. 부사나 쉼표, 수동태를 씀으로써 연약한 느낌이나 가쁜 호흡의 느낌이 강조되거든요. 이런 것도 하나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시작된 독서 토론은 1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진지하게 이어졌다. 이 수업에선 교사도 학생도 모두 평등한 독서가로서 자신의 느낌과 의견을 나눌 뿐 일방적인 강의나 받아쓰기는 없었다. 학생들은 1년 동안 이 수업에서 책도 읽고 자신만의 사전도 만들고 수필도 쓰고 소설도 쓴다. 수업이 끝나고 교사에게 “학생들의 수준이 왜 이렇게 높은 거냐”고 물었다. 교사는 “이 수업을 선택한 아이들은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보니 토론 수준이 좀 높다”면서, “우리 학교 모든 학생이 그런 건 아니다”라며 웃었다.

꿈틀리인생학교에서 학생들이 농사를 짓는 모습. 꿈틀리인생학교 제공

한국에 안착된 북유럽식 교육

2016년에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세운 꿈틀리인생학교는 ‘쉬었다 가도 괜찮아, 다른 길로 가도 괜찮아,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모토 아래 16~18살 아이들이 1년간 자신을 돌아보며 인생을 설계하는 대안교육 과정이다. 전국에서 온 20여명의 청소년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자연과 생태·민주시민 교육을 근간에 둔 자기탐색 과정을 밟는다. 논 300평에서 모내기부터 벼 수확까지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음악·미술·체육·글쓰기 등을 통해서 미래를 설계한 뒤 일반 학교나 대안학교 등으로 진로를 결정해 나아가게 된다.

이 학교가 올해부터는 서울시교육청과 손잡고 서울시 오디세이학교 지원자 중 원하는 학생들은 이곳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015년에 세워진 오디세이학교는 고등학교 1학년 시기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 배움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와 세상과 마주할 용기를 키워가는 서울시교육청 소속의 1년 과정 학교다. 오디세이학교나 꿈틀리인생학교는 일종의 ‘한국형 에프테르스콜레’로 불린다. 에프테르스콜레는 덴마크의 청소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에 1년간 자신을 성찰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교육 과정으로, 덴마크 청소년의 25% 정도가 에프테르스콜레 과정을 지원한다.

오디세이학교 교무부장이자 꿈틀리인생학교의 길잡이 교사를 맡고 있는 정병오 교사는 “2000년대 초반 우리 교육의 문제에 대한 돌파구를 북유럽 교육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한국 사회는 그대로 두면서 교육 시스템만 북유럽에서 가져와 이식하는 게 어렵다는 판단을 하던 차에, 덴마크의 에프테르스콜레 정도는 한국에 적용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비슷한 시기에 꿈틀리인생학교와 오디세이학교가 세워졌다”며 “설립 때부터 서로 교류를 해오다가 올해부터는 오디세이학교 지원자 중 기숙형 학교와 생태·자연 교육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을 꿈틀리인생학교로 보내는, 더 밀접한 교류를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디세이학교는 오디세이 민들레, 오디세이 꿈틀, 오디세이 하자, 오디세이 혁신파크, 오디세이 이룸 등 총 5곳이 있다. 중학교 3학년 졸업생 중에서 지원을 받아서 서류·면접 등을 통해 선발한 뒤 원하는 곳에 배치한다.

오디세이학교와 꿈틀리인생학교는 1년간 자기 삶을 성찰하고 미래를 설계한다는 교육의 목표와 방향은 같지만, 구체적인 교육 방식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오디세이학교는 통학형이면서 학력 인정 과정으로 국어·영어·수학·한국사 등 필수과목을 배우면서, 1년에 4~5차례에 걸친 여행과 인턴십, 다양한 프로젝트 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탐색한다. 꿈틀리인생학교는 기숙형이기 때문에 공동체 생활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이해해나가면서 생태·자연 교육을 중심에 두고 1년에 한번 덴마크 여행을 떠나 그곳 학생들과 교류도 경험한다. 이번에 오디세이학교를 지원한 학생 중 6명이 꿈틀리인생학교를 다니고 있다.

“오디세이학교와 꿈틀리인생학교를 다 둘러보고 꿈틀리인생학교가 더 느낌이 좋아서 지원했다”는 이현아(가명·16)양은 “이곳은 청소부터 빨래, 설거지 등 스스로 생활을 다 해결하기 때문에 1년 뒤면 거의 반쯤은 ‘성인’이 되어서 나갈 것 같다”며 웃었다. 또 그는 “농사를 체험 수준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짓는데다 대부분의 수업이 지식이나 이론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삶에 스며들게 배우기 때문에 일반 학생들이 할 수 없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한다는 자부심이 든다”고 말했다.

오디세이학교는 1년에 4∼5차례 여행을 다닌다. 오디세이학교 제공

자존감·주체성 회복해 일반 학교로 돌아가

이 학교들은 입학 초기에 이곳에선 무슨 말이든 해도 되고 어떤 질문을 해도 안전한 공간으로 아이들을 안심시키는 데 집중한다. 즉 배움이 일어나는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정병오 교사는 “한달 정도 지나면 아이들이 ‘와, 여기는 자유롭게 말해도 되는구나, 내 속에 있는 그대로 존재해도 평가받거나 판단받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으면서 확 피어나기 시작한다”며 “다양한 아이들이 서로 어울리며 주도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역동적인 배움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들 학교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갑자기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회의에 빠진 친구들, 내면에 끼가 많은데 일반 학교에서는 발산의 장을 가지지 못했던 친구들, 의욕도 없고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을 느끼는 친구들 등 다양한 학생이 지원하는데, 성적부터 성향까지 학생의 구성이 일반 고등학교 1학년 교실과 거의 비슷하다.

중학교 때 상위권 성적이었던 김민지(가명·17)양은 “원하는 목표가 없이 공부를 계속하는 게 힘들어서 나에게 맞는 목표를 찾기 위해 꿈틀리인생학교에 왔다”며 “일반 학교에서는 할 수 없는 여러 활동을 통해 나의 다양한 면을 발견하고 특히 기숙사 생활을 통해 나와 남이 어떻게 다른지 깨닫고 배려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많이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오디세이학교를 마친 학생들은 일반 고등학교로 돌아가게 된다. 일반고의 1학년 과정을 다시 밟고 싶으면 1학년으로 돌아가도 되고, 그렇지 않으면 2학년으로 돌아가면 된다. 80% 정도는 2학년으로 돌아가고, 10% 정도는 1학년, 10% 정도는 대안학교 등으로 진학한다.

일반 학교에 돌아가면 학업을 따라가거나 분위기에 적응하는 게 힘들진 않을까? 정병오 교사는 “많은 학생들이 돌아가서 반장을 하거나 학생회·동아리 활동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학교생활을 자신감 있게 주도적으로 한다. 진로를 꼭 여기서 결정하지 않더라도 자존감을 회복하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얻은 성취의 경험을 바탕으로 돌아가서 진로를 잘 잡아나간다”고 말했다.

오디세이학교의 자치활동은 배움의 꽃이다. 오디세이학교 제공

현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홍은지(21)씨는 “운이 좋게도 오디세이학교를 통해 진로를 결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친언니가 오디세이학교를 다니는 모습을 보고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 지원했는데,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송출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가슴 뛰는 일을 찾게 되어 언론정보학과 진학으로 이어지게 됐다”며 “일반고 2학년으로 돌아가서 주요 과목을 따라가는 게 좀 힘들긴 했지만 오디세이학교에서 계속 질문하고 스스로 이해할 때까지 고민하고 매달리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점점 더 따라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나영(대학생·22)씨는 “오디세이학교가 꿈을 딱 찾아주는 건 아니지만 꿈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준 곳”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진로보다 더 중요하게 알게 된 것은 울타리 안의 세상이 전부도 아니고 한가지 인생도 답은 아니라는 것과 사람들과 소통하고 협업하는 법,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삶의 태도”라고 덧붙였다.

교사들에게도 ‘교육의 본질’ 회복 경험

8년차를 맞고 있는 오디세이학교의 성과에 대해 정병오 교사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12년간 입시를 향해 달려가는 경쟁 구조 속에서 잠시 돌아보며 쉬어가도 된다는 것을 알리면서, 스스로 주체성과 자존감을 회복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학습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또 “설립 준비 때부터 대안교육계와 협력해 공교육 안에서 대안적인 교육이 안착되는 민관 협력의 성공적인 모델이기도 하다”며 “앞으로는 혁신학교나 특성화고등학교 등에서 1학년 과정을 오디세이학교처럼 운영하는 것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제안했다.

공교육 안에서 이런 대안교육 실천이 교사들에겐 더 버겁거나 성가시진 않을까? “오히려 일반 학교에서는 많이 지치는데 여기서는 교육의 본질을 느끼니까 지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교육의 본질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아이들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을 발견하고 끄집어내고 펼칠 수 있도록 장을 열어주고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것”이라고 답했다.

오디세이학교 학생들이 거리 공연을 벌이고 있는 모습. 오디세이학교 제공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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