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 후보작 <저주토끼>가 태풍을 만나지 않았다면

서울문화사 2022. 5. 30.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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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후보작 《저주토끼》가 태풍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업은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이다.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산다면 어둠 속에서나를 이승에 붙들어두는
닻과 같은 물건 옆에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저주토끼

출판사 아작

저자 정보라

영문판 번역 안톤 허

1쇄 출판일 2017년 3월

최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고등학생 남녀가 각자 자신을 홀로 키운 아버지에게 고백하고, ‘절망’과 ‘분노’에 빠진 아버지들이 그 감정의 폭풍을 자식들에게 퍼붓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하필 그날 바람의 섬 제주에 태풍이 몰아닥친다. 아직 어린 두 남녀는 “오늘 부는 이 태풍은 지나가는 태풍”이라며 스스로를, 그리고 상대를 위로한다. 그렇다, 모든 태풍은 다 지나가는 태풍이다.

뜬금없지만 2017년 3월에 출간된 정보라의 《저주토끼》가 2018년 10월 번역가 안톤 허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2021년 영국에서 영어판이 출간된 후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이르게 된 과정을 회상하면 나는 태풍부터 먼저 떠오른다. 그해 여름에 불었던 25호 태풍 콩레이는 5등급 슈퍼 태풍으로 캄보디아의 전설 속 소녀의 이름이었다던가.

《저주토끼》의 영어판 번역가 안톤 허와 정보라 작가가 처음 만난 건, 2018년 10월 6일 제14회 와우북페스티벌 거리도서전의 ‘아작’ 부스였다. 어떻게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느냐면, 그날은 10월 5일부터 사흘간 치러지는 거리도서전의 이틀째 되던 날, 와우북페스티벌 프로그램 중 하나로 ‘아작’에서 마련한 정보라 작가의 강연이 열린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홍지운 작가와 함께 공동 연사로 참여한 정보라 작가의 강연 제목은 ‘내 취향은 여성 슈퍼 히어로!’. “지긋지긋한 남성 슈퍼 히어로는 그만 가라, 이제 여성 슈퍼 히어로의 시대가 왔다”고 강연을 하던 날, 도대체 어떤 이야기 속 주인공인지도 모를 어느 소녀의 이름을 딴 슈퍼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했다. 거리도서전을 하면 시작 전날 부스에 책을 진열하는데, 10월 4일 밤 책을 다 진열한 상황에서 태풍 경보가 발효되는 바람에 한밤중에 다시 부스를 찾아가 책들을 다시 다 박스에 담고 대형 비닐로 방수 포장을 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이틀간 내리 비가 왔다. 그냥 비도 아니고 폭풍을 동반한 장대비.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자 몇몇 출판사는 아예 철수를 하기도 했는데, 이틀간 비를 쫄딱 맞으며 손님 없는 부스를 지킬 수밖에 없었던 건 미리 계획했던 강연들 때문이기도 했다. 실내에서 진행하는 강연 행사는 손님이 있건 없건 취소되지 않는다. 우산을 쓰고 거리도서전을 찾은 열혈 독자도 없지 않았지만 사실상 그해 거리도서전은 망한 행사였다. 그냥 망하기만 해도 괜찮은데 수백 권의 책까지 비에 젖고 습기를 머금어 도서전이 끝나면 재고는 다 버려야만 하는 상황.

어쨌든 저녁 7시 강연이 예정된 정보라 작가는 강연 시간보다 일찌감치 와서 드문드문 부스를 찾은 독자들에게 책을 팔고 있었다. 그리고 안톤 허가 비 오는 거리도서전에 등장한다. 번역가 안톤 허는 사실 또 다른 SF소설 작가 전삼혜를 만나러 온 것이었는데, 전삼혜 작가의 소설을 영어로 번역한 인연이 있었던 터였다. 전삼혜 작가는 또 왜 태풍이 몰아치는 날 ‘아작’ 부스에 있었던가. 정보라 작가도 그랬지만 전삼혜 작가 역시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작품을 발표해왔는데, 2018년 거리도서전의 ‘아작’ 부스에서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이 십수 년간 자체적으로 만들어온 책들을 일부 전시해두고 판매를 하고 있었다. 책만 두고 사람은 없으면 안 되니까 ‘환상문학웹진 거울’ 소속 작가들은 순번을 정해 첫날부터 ‘아작’ 부스를 지켰고, 마침 그날이 전삼혜 작가의 당번일이었다. 그렇게 전삼혜를 만나러 온 안톤 허와, 강연이 있어 행사에 왔지만 괜히 일찍 와서 ‘아작’ 책을 열심히 팔고 있던 정보라가 운명적으로 만난다. 전삼혜 작가가 눈에 보이지 않자 안톤 허는 책들을 구경하던 참이었는데, 안톤 허의 눈이 이런저런 책에 닿을 때마다 정보라 작가는 그 책에 대한 설명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어느 책 한 권에 이르자 정보라 작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안톤 허 번역가는 궁금했다. 왜 이 책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안 하지? 그렇게 재미없는 책인가? 오히려 그래서 안톤 허는 책을 펼쳐 들게 된다. 그리고 안톤 허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로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책을 팔던 사람에게 말한다. “저 번역가인데요. 이 책을 번역하고 싶습니다.” 책을 팔던 사람이 말한다. “제가 이 책 저자인데요. 그리고 저도 번역을 합니다만.”

그 책이 바로 《저주토끼》였다. 25호 태풍 콩레이가 한반도를 관통하던 2018년 10월 6일 오후, 비 오는 와우북페스티벌 거리도서전에서 생긴 일이었다. 《저주토끼》는 정보라 작가가 1998년 대학생 시절 쓴 <머리>에서부터, 2015년 작 <저주토끼>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근 20년간 ‘환상문학웹진 거울’을 비롯해 각종 지면에 발표한 100여 편의 중단편 중에서 ‘복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모아 2017년에 출간한 책이다. 《저주토끼》는 집안 대대로 저주용품을 만드는 화자의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로,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용품을 만들면 안 되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자살한 친구를 위해 저주용품을 만들어서 벌어지는 이야기. 이 단편을 포함한 다른 수록작들도 모두 통쾌한 복수극으로 보이지만, 정보라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밝힌 대로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롭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작가 자신을 비롯해 많은 독자들이 《저주토끼》가 SF소설집이 아니라 호러 소설집이라고 말들을 많이 하지만, 정보라 작가의 작품이 해외에서 호평을 받는 이유 중에는 작가가 과학소설(Science Fiction)로서의 SF에 한정하지 않고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로서의 SF적 전통에 충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전적이고 일반적인 가정과 상황을 뒤집음으로써 ‘공포’와 ‘경이’를 끌어내는 데 정보라 작가만큼 탁월한 이야기꾼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사실 나는 이제 와서야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지만, 번역가 안톤 허는 어느 인터뷰를 통해 이 책의 영문판이 성공할 것이라는 데에 단 한 순간도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유머와 슬픔 같은 상반되는 감정을 하나의 문장으로, 그것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으로 풀어내는 작가와 작품을 한국문학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나.

태풍 콩레이가 맺어준 두 사람의 인연은 정보라 작가의 장편 《붉은 칼》과, 작가의 또 다른 소설집 《그녀를 만나다》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저주토끼》를 출간한 영국 출판사 혼포드 스타에서 두 책을 더 내기로 한 것. 지나간 태풍이 맺어준 인연 덕분에 또 어떤 태풍이 우리를 찾아올지 설레며 기다리게 된다.

WORDS 최재천

SF 전문 출판사 ‘아작’의 편집장으로,《저주토끼》의 책임편집을 맡았다.


NEW BOOKS


《작별인사》

《 살인자의 기억법》이후 9년 만에 내놓은 김영하의 장편소설. 유명한 IT기업의 연구원인 아버지와 쾌적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주인공 철이가 어느 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가 난생처음 날것의 감정으로 가득한 혼돈의 세계에 맞닥뜨리게 된다. 디스토피아의 세계 속에서도 자신처럼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만나 소속감을 느끼고 우정을 싹 틔우는 철이는 수용소를 탈출해 집으로 돌아가지만 새로운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다. 작가는 긴 이야기를 통해 삶이란 과연 계속될 가치가 있는 것인지,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김영하 지음, 복복서가.

《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지난해 한 신문사의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한 고(故) 이순자 씨의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저자의 취업 스토리는 SNS에서 큰 화제가 되었지만, 수상 후 영면 소식이 전해져 안타까움을 남겼다. 하지만 그녀의 글들은 세상에 남아 생에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게 됐다. 4대가 함께 사는 종갓집 맏며느리로 결혼 생활을 시작해 황혼 이혼 후 62세에 취업전선에 나선 저자의 이야기 <실버 취준생 분투기>를 포함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의 존엄을 품위 있게 지켜낸 산문들이 담겨 있다. 이순자 지음, 휴머니스트.

《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김수영 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황인찬 시인의 첫 산문집. 네이버 오디오클립 ‘황인찬의 읽고 쓰는 삶’에 연재된 콘텐츠를 선별해 실었다. 시인은 마흔아홉 편의 시를 소개하고 세심한 태도로 수많은 슬픔을 헤아린다. 타인의 슬픔을 짐작하며 거기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사랑은 다를 수밖에 없는 너와 나를 잠시나마 하나일 수 있게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시를 통해 성장하고, 시를 통해 함께 읽고 생각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황인찬 지음, 안온북스.

에디터 : 심효진  |   포토그래퍼 : 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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