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처럼 자유롭게 꿈꾸는 '고산의 미래'들[현장에서]

박용근 기자 2022. 5. 30.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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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전북 완주군 고산면 청소년센터 ‘고래’의 쉼터에서 팔씨름을 하고 있는 두 명의 남학생들을 친구들이 응원하고 있다.
고산면 농협창고에 만든
완주군 청소년센터 ‘고래’
학습·휴식·체험·진로상담
“나만의 천국 같은 공간”

전북 완주군 고산면은 산악지대로 오지 마을이 대부분이다. 버스를 한 번 타려면 1~2시간씩 기다려야 한다. 고산초등학교 옆에는 청소년센터 ‘고래’가 있다. 완주군이 2017년 농협 창고건물 2동을 사들여 프로그램실과 청소년아지트, 세미나실로 리모델링한 곳이다. 시골 청소년들이 집으로 돌아갈 버스를 기다리거나, 학원 갈 시간에 맞춰 학교 밖에서 편히 쉴 공간을 제공해주자 호응이 컸다. 고래는 학생들이 방과 후 공부도 하고 수다를 떠는 쉼터로 자리잡았다. 한때 전국적인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올라 지금까지 45개 지자체에서 1964명이 다녀갔지만 코로나19가 급습하면서 휴관을 반복했다. 그런 고래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일상회복과 함께 학부모와 학생들의 요구가 커지면서 다시 문을 연 것이다.

지난 25일 ‘청소년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곳을 찾았다. 막 학교 수업을 끝내고 고래에 들어온 학생 20여명이 자유분방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책가방을 내던지고 친구들과 까르르 웃다가 책을 읽는가 하면 탁구대에서 라켓을 휘두르며 땀을 흘리는 학생도 보였다. 드러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남학생 서너명은 기자가 다가서자 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그리며 눈인사를 건넸다. 학생 수는 금세 40여명으로 늘어났다.

고산중 이승주양(2학년)은 “학교 수업을 끝내고 이곳으로 바로 왔다. 친구들과 숙제도 같이하고 수다도 떠는 게 너무 신나고 즐겁다”면서 “만약 고래가 없었다면 학원 가기 전까지의 시간을 편의점이나 길거리에서 보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김민권군(2학년)은 “고래는 안방과 같은 나만의 천국 같은 공간”이라며 “이곳에서 책도 읽고 쉬다가 버스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루 일과가 알차졌다”고 거들었다.

고래의 별관에서는 여학생 10명이 모여 간식인 밤만쥬를 만드는 요리 수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소금과 설탕을 계량하고 물엿과 계란, 버터의 비율을 맞추려는 학생들의 얼굴엔 진지함이 가득했다. 한 학생은 “이곳에 오면 재미있고 편안하다”고 미소를 지었다. 간식재료는 지역 주민들이 십시일반 보내준다고 했다.

고래는 완주군이 파견한 2명의 청소년지도사와 청소년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고래라는 명칭부터 청소년들이 제안하고 투표를 거쳐 결정됐다. 고래는 ‘고산의 미래’와 ‘오래된 미래’를 뜻한다. 넓은 바다를 누비는 거대한 고래처럼 청소년들이 큰 꿈을 꾸며 세계로 나아가자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장형군(운영위원장·고산중 3)은 “누나를 따라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고래를 방문했는데, 지난해 선배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위원장에 자원했다”며 “청소부터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하다 보니 꿈도, 실행의지도 단단해지는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학부모들도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주부 김민주씨는 “아이가 이곳을 다니면서부터 몰라보게 웃음이 많아지고, 포부도 당당해진 것 같다”면서 “시골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학습과 진로 상담, 요리 체험 등 매년 진행하는 4~5개의 프로그램이 알차게 운영되고 있어 걱정을 덜게 됐다”고 말했다.

김동훈 청소년지도사는 30일 “소외되기 쉬운 시골 청소년들이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안문화의 공간이자 학교 밖 학교, 마을 도서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글·사진 박용근 기자 yk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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