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강수연'은 없지만 그만의 '명연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 영화가 1980년대 암흑기를 거쳐 2000년대 세계 영화계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고인이 발판 구실을 했다. 국내 언론은 잇단 영화제 수상 이후 고인의 이름 앞에 국내 배우 최초로 ‘월드 스타’라는 수식을 붙이기 시작했다.”
지난 7일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배우 강수연을 두고 언론의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지금까지 펴낸 12권의 영화평론집을 새삼 펼쳐 보았다. ‘강수연 출연작’을 보고 그의 연기에 대해 썼던 글들을 찾아보며 고인을 영원히 기리고 싶어서였다.
1992년 발간한 첫 영화평론집 <우리영화 좀 봅시다>를 비롯해 <한국영화 씹어먹기>(1995) <한국영화 산책>(1996) <한국영화를 위함>(1999) 등을 펼쳐보니, 고인의 전성기 시절인 1990년대에 쓴 글들이 역시 많았다. 2004년 펴낸 방송평론집 <텔레비전 째려보기>에도 강수연에 대한 글이 있었다. 2001년 1월 중순 전국의 일간지 연예면을 장식한 강수연 인터뷰 기사를 보고 쓴 것이었다. 영화 만을 고집해오던 그가 16년 만에 티브이 출연해 화제였는데 바로 사극 <여인천하>(SBS)였다.
1985년 내가 영화평을 쓰기 시작한 이래, 한 배우의 출연작 7편을 보고 그때마다 글을 쓴 것은 유일했다. 유독 그에 대한 글이 많아 스스로도 놀랐다. 그만큼 강수연이 왕성한 배우 활동을 했다는 증표였다.
평론들 가운데 몇 문장을 옮겨본다. ‘배우 강수연은 어느 작품에서나 발광하듯 돋보인다. 1987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씨받이>에서 ‘옥녀’는 배역에 철저히 맞아 떨어져 영화 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왕서방 앞에서 처음 옷을 벗을 때 흘리는 <감자>의 표정 연기는보다 ‘씨받이’에서보다 윗길로 보인다.’ ‘한편 강수연의 출연료는 12만 달러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개봉된 <베를린 리포트>에서도 1억 원을 현찰로 받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 값을 해냈는지 따져 보자. 내가 기억하기로 강수연의 연기가 일품인 영화는 손창민과 공연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이다.’ ‘<장미의 나날>에서 실망스러운 것은 이 영화의 중요한 부분인 재희(강수연)의 섹스신이 미스터리와 잘 맞아 떨어지지 않은 채 각각 놀고 있는 점이다. …그가 출연한 어떤 영화보다도 잦은 섹스신에서 강수연의 표정·자세·분위기 등은 압권이었다.’ ‘<블랙잭>에서, 우선 강수연(장은영 역)의 섬세한 심리연기를 특기할만하다. 도입부에서 강한 거부감을 보인 끝에 오세근(최민수)과 키스하는 사실감을 보이더니 “날 안믿는 거죠” 할 때나 “왜 전화한 게 잘못이예요?” 물을 때의 백치미어린 표정 연기가 그것이다. 에로틱 스릴러가 아니라면 선뜻 이해하기 힘든 장은영의 그런 천사와 악마의 이중적 모습을 강수연이 과연 월드 스타답게 섬세한 심리연기로 커버해낸 것이다. 그런 모습은 결말의 “당신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날 믿지 말아요”에서 절정을 이룬다.’
지난 5월 7~8일 이틀 연속 고인의 빈소를 찾은 임권택 감독은 “좋은 연기자를 만난 행운 덕분에 내 영화가 좀 더 빛날 수 있었다. 여러모로 감사한 배우”라며 말을 잇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는데, 맞는 말이지 싶다.
임 감독은 강수연에게 <씨받이>(1987)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각각 베니스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게해 준 거장이다. 그로부터 20년도 넘게 지난 2011년 강수연은 임 감독의 102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에 출연하는 의리를 보였다.
한편 영화 속 명대사로 회자되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자그마치 1341만여명이 극장을 찾은 <베테랑>에서 황정민이 한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은 강수연이 술자리에서 처음 했고, 류승완 감독이 대사로 집어넣었단다.
“우리에게 강수연은 없지만, 그가 남긴 명연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부디 영면하시길!
전주/장세진 문화평론가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 투표율 50% 넘을락 말락…다급한 민주당, 투표 독려 총력전
- “대통령, 국민 고충 들어야…‘집무실 앞 집회금지’ 입법해도 위헌소지”
- [속보] 오후 5시 투표율 47.6%…6시30분부터 확진자 투표 시작
- [영상] 바이든 백악관서 BTS와 ‘K-하트’ 날리며 “당신들한테 감사하다”
- 여론조사 돌리고, 티에프 만들고…전경련, 윤석열 정부 홍보수석?
- 책 보러 나왔어요!…3년 만에 제대로 열린 책 축제, 대성황
- 손흥민 발끝에 모인 시선…벤투호, 3년 전 브라질전 0-3패 설욕?
- 대선보다 어려운 지방선거…지상파 ‘쪽집게 예측’은 계속될까?
- [결말, 어땠어?] 그래서 구씨는 어디로?…날 결말에서 해방시켜줘
- [단독] 확진자 검사·치료 통합한 ‘호흡기환자 진료센터’ 4천곳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