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참교육에 뜨거웠던 '오십년지기' 동지가 곁에 없으니.."

한겨레 2022. 5. 30.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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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가신이의 발자취] 고 이동진 선생 기리는 친구의 글
1980년대 중반부터 부부 교사로 ‘전교조’ 참교육운동에 앞장섰던 고 이동진(왼쪽)씨와 부인 표외숙씨가 고향인 전북 남원이 내려다보이는 지리산 정령치에서 함께한 모습이다. 사진 김민곤씨 제공

1972년 입학 동기…‘민청학련’ 구속
1985년부터 ‘교육민주화운동’ 두차례 옥고
2015년까지 국제교원노조운동 앞장
낙향해 자연농업연구 5년만에 사고사

모내기할 논을 오가는 트랙터가 이젠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요즘이다. 동진아, 네가 2020년 12월 6일 트랙터 사고로 졸지에 우리 곁을 떠나고 벌써 다섯 번 철이 바뀌었다. 너무 황망해서 격식 갖춘 영결식도 챙기지 못해 내내 켕겼다. 지금도 느닷없이 너한테 전화가 올 것 같다. “어디 있냐? 나 서울 가는 중인데 얼굴 좀 보자!”

우리가 만난 지 꼭 반세기가 됐구나. 며칠 전 불어과 동기들이 50년 전을 회고하는 자리가 있었다. 1972년 유신독재에 맞섰던 스무 살 청년들이 일흔 고개를 넘고 있다. 벌써 빈자리가 둘이다. 대학은 수시로 휴교로 문을 닫고 사는 것이 팍팍하던 1974년 4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너는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지. 그렇게 학교에서도 쫓겨나 구로동에서 야학도 하고 난방기술 자격증도 따서 '보일러 학원’ 강사 활동도 하면서 6년이나 학교 밖에서 버텨내야 했다. 1980년 초 ‘서울의 봄’ 복학생이 된 네가 사립학교 프랑스어 초임교사로 일하던 나를 찾아와 우리는 재회했지. 그 간 살아온 역정을 들려주면서 네가 쓴 프랑스어 단어 ‘쇼디에르’(보일러)를 기억하고 있어. 그때 네 권유로 1980년 교육민주화운동 초석 노릇을 한 서울와이엠이에이(YMCA) 중등교사회에 참여하게 됐으니 우리 인연은 남다른 데가 있어.

너는 1985년 3월 비로소 교직에 들어와 그 때부터 우리는 교사운동 대열에 늘 함께한 동지가 되었지.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서울 강남동지회장을 맡은 너는 그해 여름 또 구속됐고 말았어. 나는 ‘ 빵 복’ 많은 너를 좀 부러워하기도 했단다. 100명 넘는 교사를 구속하고 1500명이 넘는 교사를 교단에서 쫓아내는 국가폭력이 자행된 때였어. 그해 늦가을 너의 석방 환영회 자리에서 ‘빵잽이 부담감을 벗게 됐다!’ 고 했을 때 환호작약하던 네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엊그제가 전교조 33돌 기념일이었네.

‘내 벗 이동진은 재야운동 진영에 발이 넓어 정권이 전교조를 탄압할 때 연대사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91년 ‘고 강경대 열사 폭력 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또 구속되어 징역 2년 6월(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세 번째 수난이었다.

교육인터내셔널(EI) 본부는 2020년 12월 6일 고 이동진 중앙집행위원이 별세하자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EI 누리집 갈무리

1994년 3월 해직교사들이 신규 특별채용 형식으로 복직했을 때 그는 복직을 미루고 국제국장을 맡아 여러 나라 교원노조와 국제기구에 전교조 사정을 알리고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냈다. 이 경험을 밑바탕 삼아 그의 활동 범위는 국제교원노조운동으로 확대됐다. 마침 1993년 교육인터내셔널(EI)이 출범했을 즈음이었다. 그는 교육인터내셔널 아시아·태평양지역 집행위원을 거쳐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1998년 해직교사 생활 10년 만에 교단에 복직한 그는 서울 구정고, 경기기공 등에서 프랑스어와 영어 교사로 일하다가 2015년 명예퇴직했다.

이동진은 먼저 명퇴한 평생 동지 아내(표외숙)를 따라 고향 남원으로 귀농을 했다. 이 때부터 그가 관심을 쏟은 것은 생태계와 지구 환경 문제였다. 그는 무엇보다 땅을 살리는 친환경농법을 부지런히 배워 적용했다. 남원시 아영면 아막산성 아래 넓은 밭을 일구어 감자 오미자 두릅을 비롯하여 다양한 작물을 재배했다. 질 좋은 퇴비와 생태 친화 농약을 연구했다. 지리산 친환경자연농업연구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고 지역 농민들과 친환경 고추작목반도 조직하여 도농 상생 교류 통로도 열었다. 특히 이동진은 남원이 간직한 역사와 문화를 사랑했다. 향토사를 배워가는 동안 남원 동학농민운동을 깊이 공부했다.’

그는 매사 의욕과 열정이 넘쳐 아내가 옆에서 말리기라도 하면 ‘백세시대에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 고 큰소리를 쳤다. 그 렇게 열심히 살던 내 동무가 퇴비를 나르던 중 트랙터가 넘어져 우리 곁을 영영 떠나버리다니! 엄청난 충격이고 우리 운동에 큰 손실이었다. 이 기막힌 소식을 접한 프레드 반 리우웬 전 교육인터내셔널 사무총장은 “너무나도 슬픈 소식이다. 오랫동안 나에게 그는 전교조 자체였다. 그는 오랫동안 전교조의 합법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전 세계 교원노조로부터 전교조에 대한 엄청난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질높은 교육과 교사들 복지를 위한 투쟁에 그의 삶을 바쳤다” 라며 애도했다.

고 이동진씨가 일궈놓은 전북 남원의 한결농장에서 지난 3월 중순 씨감자를 심고 있다. 사진 김민곤씨 제공
지난 봄 심었던 감자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전북 남원 한결농장의 5월 전경. 사진 김민곤씨 제공

내 오랜 친구 동진아, 지금 이 순간 거리에는 지자체 선거와 교육감 선거 홍보물이 천지다. 개중에는 ‘전교조 교육 아웃(OUT)!’ 이라고 써 붙인 것도 보인다. 우리가 청춘을 바쳐 펼치고자 했던 참교육 실현 대의와 곽노현 교육감 시절 혁신학교 정책자문위원회에서 헌신했던 네 노고들을 깡그리 부정하려 드는 ‘작태’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통탄할 일이다. 네가 아끼던 후배가 더 멋진 구호로 맞대응해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촌지 거부 운동에서 학교 혁신 운동까지!” “전교조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그대는 학생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남원 ‘한결농장’엔 지금쯤 오미자 덩굴 기세 좋게 뻗어나가고 감자 꽃도 만발했겠다. 홀로 남아 사래 긴 밭 돌보는 표 선생이 허리 펴고 고개 들면 저 멀리 지리산 대맥이 무정하게 흐르고 아막산성 뻐꾸기 하염없이 울어쌓겠다.

김민곤/전 전교조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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