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테이블'한 스테이블코인..중앙銀 '디지털화폐' CBDC 대세론 힘 받나
한국산 가상화폐로 ‘K코인’이라 불렸던 루나와 테라USD(UST)의 폭락 사태가 전 세계 가상자산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테라폼랩스가 만든 이 가상화폐는 루나 공급량을 조절해 테라 1개의 가치를 1달러에 맞추는 알고리즘이 적용된 스테이블코인이다. 법정화폐에 가치를 연동해 가상화폐의 취약점으로 지목됐던 가치 변동성을 낮췄다는 의미에서 안정적이라는 의미의 ‘스테이블’ 수식어가 붙었지만 이번 사태로 스테이블코인 역시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각국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화폐인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연구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도마 오른 스테이블코인
▷시총 1위 테더도 ‘흔들’
테라처럼 가치를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화폐를 스테이블코인이라 부른다. 스테이블코인은 기축통화인 미국달러(USD)와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가치를 보전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가령, 테라는 자매코인 ‘루나’로 가치를 보전하는 반면,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 1위 테더(USDT)는 법정화폐나 기업 채권 등으로 준비금(reserve)을 보유하고 있다.
루나·테라 사태가 일파만파 확산되면서 금융 시장에서는 테더 역시 도마에 올랐다. 미국달러와 1:1로 페그(Peg)하는 테더는 루나처럼 알고리즘으로 페그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금으로 페그를 유지하는 구조다. 그런데 루나 폭락 사태로 자산을 모두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투자자들을 덮치자 ‘코인런’이 연쇄적으로 빚어졌다. 테더에서 자금이 이탈하면 준비금을 매도해 투자자에게 돈을 내줘야 한다. 문제는 준비금이 대부분 만기 1년 이하 초단기 채권(Treasury bill, 52.4%), 기업 어음·CD(36.7%), MMF(4.6%) 형태로 구성돼 있다는 데 있다. 초단기 채권과 CP를 준비금으로 갖고 있다는 것은 만약 ‘코인런’이 빚어진다면 투매를 뜻하는 ‘셀오프(sell-off)’ 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가령, 투자자에게 돈을 돌려주기 위해 준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CP를 내다 팔기 시작하면 단기 채권 물량이 시장에 집중적으로 쏟아지면서 채권 가격이 급락하는 등 시장에 일대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
▶美·中 ‘디지털 패권’ 갈등
▷CBDC 도입 빨라질 듯
이런 우려가 시장에 확산하면서 중앙은행의 디지털화폐인 CBDC 발행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CBDC는 간편결제나 모바일뱅킹 같은 결제수단과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다. 삼성페이를 비롯한 여러 간편결제수단 역시 디지털화폐의 한 종류다. 종이로 된 지폐가 없어도 얼마든지 재화나 서비스를 거래하는 것이 가능하다. CBDC가 기존 디지털화폐와 구분되는 점은 은행의 역할이 최소화된다는 것이다. 간편결제 서비스를 쓰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이에 연동된 은행 계좌가 있어야 한다. CBDC는 신용 거래의 매개자로서 시중은행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는 CBDC에 블록체인 기술이 도입되기 때문이다. CBDC는 은행이라는 별도 중개기관 없이도 블록체인 기술 덕분에 상호 금융 거래를 손쉽게 기록하고 증명할 수 있다. 기존 실물 화폐는 ‘중앙은행 → 조폐공사 → 상업은행 → 경제 주체’였다면, CBDC는 ‘중앙은행 → 경제 주체’로 간소화된다.
이미 주요국 중앙은행은 CBDC 연구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은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대규모 CBDC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이미 1억명이 넘는 디지털 위안화 사용자를 자랑한다. ‘달러 패권’ 붕괴를 우려해온 미국 정부도 중국을 견제하려 정부 주도로 CBDC 연구에 역량을 쏟고 있다. 지난해 ‘디지털 유로 프로젝트’에 착수한 유로존은 2년간의 조사를 거쳐 2023년 디지털 유로 도입 여부를 확정할 계획이다. 한국은행은 지난해부터 ‘중앙은행 CBDC 모의실험 연구 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모바일 기기를 통한 오프라인 결제와 국가 간 송금 등 2단계 실험을 진행 중이다.
특히 중국과 미국의 ‘디지털화폐 패권’ 다툼은 CBDC 도입 시기가 앞당겨질 것이라는 관측이 대두된 배경이다. ‘달러 패권’을 무너뜨리는데 혈안이 된 중국은 디지털화폐 시장에서만큼은 미국을 앞지를 목적으로 디지털 위안화의 상용화 시기를 조금이라도 앞당기는 데 사활을 걸었다. 중국 인민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까지 2억6100만개의 디지털 위안화 지갑이 열렸고, 총 거래액은 876억위안(약 16조8822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CBDC 도입으로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고사할 것인지를 두고는 여러 논쟁거리가 뒤따른다. CBDC와 스테이블코인의 상호 장단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우선, CBDC는 화폐 가치가 안정적이다. 스테이블코인 역시 달러 같은 법정화폐에 가치가 고정돼 있지만, CBDC는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근간으로 하므로 법정화폐와 실질적으로 동일한 신뢰도를 갖는다. 이에 반해, 스테이블코인은 이번 사태처럼 예측 불가능한 돌발 변수로 ‘코인런’이 초래된다면 그 가치가 제로로 수렴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CBDC의 장점은 이외에도 몇 있다. 중앙은행이 발권한 모든 디지털화폐의 이동 경로를 추적할 수 있어 비자금 조성 같은 불법·탈법 금융 거래 가능성은 사라진다. 화폐 발권 비용도 거의 없다. 디지털화폐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한 IT 인프라만 있으면 된다. CBDC가 활성화하면 조폐공사 같은 곳은 설 곳이 없어진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의 확장성은 CBDC가 따라잡기 힘든 경쟁력이다. CBDC는 화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그 역할이 제한되지만 코인은 지급결제에 국한하지 않고 금융·물류·콘텐츠·사물인터넷 등 여러 산업과 서비스에 다양하게 활용된다. CBDC는 개별 국가의 법정화폐에 고정돼 있으므로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쓸 수도 없다. 무엇보다 CBDC는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기반으로 한 중앙집중적인 금융 시스템을 추구한다. 블록체인 시스템이 표방하는 탈중앙화라는 본질적인 가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이 때문에 디지털 달러 같은 강력한 CBDC가 현실화하더라도 탈중앙화에 뿌리를 둔 코인 생태계가 붕괴할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낮다는 지적이다.
정순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제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CBDC 발행이 금융 중개 기능과 대출에 미치는 영향은 충분히 관리 가능하다”며 “이자와 용도, 보유 한도, 사용 지역과 시기 등을 정해 발행과 설계 단계에서 위험 수준을 관리한다면 현재보다 더 효율적으로 통화 정책을 구사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배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61호 (2022.06.01~2022.06.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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