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이상한 매력.. "스스로 사랑하는 게 해방" [김재동의 나무와 숲]

김재동 2022. 5. 30.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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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김재동 객원기자] 이 낯선 드라마가 성공할 수 있을까?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극본 박해영, 연출 김석윤) 첫 회를 보고 들었던 느낌이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괴팍하거나 생경하고 스토리는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추앙’·‘갈구’·‘환대’ 따위 대화체로 쓰기 힘든 문어체 표현들이 버젓이 대사로 연기자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와 살짝 소름 돋게 하기도 했다. 대체 16회를 어떻게 감당할 작정이지?

하지만 이 이상한 드라마는 이상하게 마음을 끌었다. 하나같이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들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고 작가는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의문 부호가 찍혔다. 매회 다음회를 꼽아보게 만드는 연출도 유혹적이었다.

2%대 시청률로 시작한 이 드라마는 29일 마지막회에서 전국 유료방송가구 기준 시청률 6.728%를 기록했다. 방송 내내 우상향 그래프를 그렸다. 시청률과 상관없는 화제성도 독식했다. 이 이상한 드라마의 이상한 매력에 빠진 것이 비단 나 하나만은 아니라는 방증이다.

결국 드라마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하기가 너무 힘든 사람들의 얘기였다. 하나하나 뫼르소이자 바틀비고, 그레고르 잠자인 ‘관계 속의 섬’ 같은 사람들이 자신마저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의, 혹은 본인 내면의 부조리로부터 해방되는 이야기다.

작가, 연출, 배우는 ‘실존’이라는 소설적 주제를 드라마란 장르를 빌어 성공적으로 구현해냈다. 모두의 성공이라고 감히 단언할만 하다.

계란 노른자 같은 서울을 둘러싼 계란 흰자 같은 경기도의 남쪽 끝 산포마을에는 염미정(김지원 분)네 가족이 산다. 아버지 염제호(천호진 분)는 씽크대 공장을 운영하며 땅도 좀 있어 농사도 병행한다. 제법 여유로울 수 있는 형편 같지만 사랑하는 여동생 빚보증을 잘못 서 삶이 팍팍하다. 그 밑으로 기정(이엘 분), 창희(이민기 분), 미정 3남매가 서울로 출퇴근하며 직장생활을 꾸역꾸역 버텨낸다. 이들 3남매는 왕복 서너시간의 출퇴근에 녹초가 된 채 주변부 인생답게 활기를 잃어간다.

그 산포마을에 신원불상의 ‘구씨’(손석구 분)가 등장한다. 모종의 사건으로 도피중 전철을 잘못 내려 산포마을에 닿았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빈 집을 빌은 게 미정집 앞집이다. 구씨는 이후 염제호의 공장 일과 농사 일을 도우며 한솥밥을 먹게 된다. 남는 시간 대부분은 술과 함께다. 대취하거나 만취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술에 절어있는 명실상부한 알콜릭.

사람을 거슬려하는 구씨에게 묵묵히 일만 하는 염제호는 최고의 파트너다. 안방마님 곽해숙(이경성 분) 정도나 영양가 없는 몇마디 말을 건넬뿐 활기없이 제 앞가림에 급급한 3남매도 그의 안식을 방해하지 않는다.

거슬리는 사람없이 혼자만의 드링킹 라이프에 안주할 즈음 염미정이 육박해 오더니 다짜고짜 자신을 추앙하란다. 마치 노느니 장독이라도 깨라는 투로. 자신을 추앙하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면서.

이 참신한 개소리가 구씨를 움직인 것은 구씨로서도 의외다. ‘추앙’이란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도 본다.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도 유혹적이다. 호스트바 선수로도 뛰어봤고 마담노릇도 해봤고 클럽 경영도 해보면서 그간의 인생엔 질릴만큼 질렸다. 다르게 산다는 것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염미정의 도발을 기점으로 구씨는 산포생활에 시나브로 녹아들어간다. 갑질하는 씽크대 의뢰주 앞에 주눅 든 염제호 대신 대금도 받아내 오고 추앙한답시고 염미정 마중나가는 일과도 싫지 않다. 동네 꼬마처럼 형, 형 하며 따르는 염창희에겐 수억대 외제차도 빌려준다. 이대로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느낄 즈음 옛 인연이 따라붙는다. 백사장(최민철 분)을 우연히 만나고 신회장이 찾아오고 돌보던 선배도 찾아든다. 아마도 산포생활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손석구의 연기는 자연스럽다. 이질적인 캐릭터를 제대로 이질적으로 만든다. 싫다는 내색조차 없이 상대말 씹고 스쳐가는 모습에, 큭큭거리다 푸홧하고 터지는 웃음하며, 속삭이다 느닷없이 백화점이 떠나가도록 퍼붓는 쌍욕하며, 액션씬은 고작 도박빛 받으러온 조폭들과의 한 씬 뿐이지만 16화를 망라해 함부로 할 수 없는, 시한폭탄같은 폭력적인 분위기를 구축했다. 캐릭터 구축을 위해 일정부분 대사전달을 포기한듯한 인상도 준다.

작품 잘고르는 연기자 김지원도 ‘염미정’으로 본인의 선구안을 또 한번 과시했다. “나는 예쁜 척 하는게 아니라 예쁘게 태어난건데 남들이 막 예쁜 척 한다해서 애라는 힘들어”라는 애교 대사의 주인공 ‘쌈마이웨이’ 최애라의 얼굴을 의례적인 미소 외엔 무표정하게 고정시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염미정을 완성했다. “사람하고 끝장보는 거 못하는 사람은 못한다고! 얼굴 붉히는 것도 힘든 사람한테 왜 죽기로 덤비래!”란 절규가 딱 어울리는 염미정으로.

이민기 역시 철 안들고 속 없어 갈피 못잡는 염창희 역을 찰떡같이 소화했다. “솔직히 어디에도 깃발 꽂을만한 데를 발견하지 못했다. 돈, 여자, 집, 차.. 다들 그런 거에 깃발 꽂고 달리니까 덩달아 달린 것 뿐. 욕망도 없었으면서 그냥 같이 달렸다.”는 독백처럼 또렷이 바라보는 염창희의 눈동자는 고정돼 있음에도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상을 주었다. 운명처럼 잘못 들어온 장례지도사 교육장에서 혼자 짓는 미소는 그 흔들림의 종언을 시청자에게 알렸다.

‘금사빠’ 염기정 역을 맡은 이엘의 연기도 압권이었다. “저는 관심이 가는 순간, 바로 사랑이 돼요. 단계라는 게 없어요. 처음부터 바로 그냥 막 많이 좋아요” 등등 이엘의 대사는 주저리주저리가 대부분이다. 그 끊임없는 주절거림을 이엘은 입을 작게 벌려 낮고 뭉개지는듯한 목소리로 웅얼대 노처녀 사랑지상주의자의 푼수끼를 귀엽게 풀어나갔다.

드라마는 해피엔딩이다. 모두가 스스로를 사랑 못하게 만드는 굴레들을 벗어던졌다. 해방이다. 살다보면 또다시 굴레들을 되쓰게 될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드라마가 끝났으니까. 구씨도, 염미정도, 염기정도, 염창희도 사라졌으니까. 분명한 건 그들의 해피엔딩이 위로가 됐다는 것. 시청자 누군가는 ‘나의 해방일지’를 쓰기 시작했을지 모른다는 정도의 기대면 충분하다.

/zaitung@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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