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민주당에는 더 많은 '박지현'이 필요하다

최혜정 2022. 5. 2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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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상임선대위원장이 27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아트홀에 설치된 사전투표소에서 투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혜정 논설위원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의 ‘86세대 용퇴’ ‘팬덤정치 결별’ 요구로 촉발된 민주당 내전이 28일 밤 임시봉합됐다. 비대위는 이날 “걱정을 끼쳐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 “그간의 여러 문제를 다 매듭지었다”고 강조했으나,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발씩 물러났을 뿐이다. 박지현표 쇄신 논의는 핵심 뇌관을 품은 채 선거 뒤로 미뤄졌다. 다만 이와 별개로 나흘간의 ‘박지현 사태’가 보여준 것은 선거 국면 아래 가려져 있던, 여전히 바뀌지 않은 민주당의 모습이다.

사실 박 위원장의 제안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는 민주당의 지지율 급락 원인을 두고 “대선에서 졌는데도 내로남불도 여전하고, 성폭력 사건도 반복되고, 당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팬덤정치도 심각하고, 달라진 것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가 비대위원장으로 합류할 때 약속했던 쇄신안을 구체화해 언급했다. 그가 제시한 ‘더 젊은 민주당, 더 엄격한 민주당, 약속을 지키는 민주당, 폭력적 팬덤과 결별한 민주당, 미래를 준비하는 민주당’은 그가 지난 3월14일 비대위 합류 첫날 공개석상에서 밝힌 내용을 반복한 것이다. 그는 당시 성비위 무관용 원칙, 여성·청년 공천 확대, 정치권의 온정주의 뿌리 뽑기 등을 쇄신 방향으로 천명한 바 있다.

당 지도부의 공분을 산 ‘86세대(80년대 학번, 60년대생) 용퇴론’과 동일 지역구 4선 연임 금지 역시 민주당의 오랜 ‘쇄신 레퍼토리’다.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퇴 이후 86그룹 용퇴론이 제기됐고, 대선 전인 지난 1월 송영길 대표는 “저부터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며 세대교체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동일 지역구 4선 금지는 민주당 정당혁신추진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선거법 개정안까지 제출한 사안이다. 박 위원장이 기습적으로 내놓은 ‘폭탄선언’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국민 앞에 내놓은 약속을 식언한 쪽은 민주당이다. ‘왜 지금이냐’는 시점에 대한 지적은 있지만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논란의 끝에는 ‘박지현’이라는 존재가 있다. 지도부 간 고성이 오간 지난 25일 선거대책위원회 풍경은 박 위원장에 대한 당 주류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86 정치인 용퇴’를 논의하자는 박 위원장의 발언에 윤호중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은 책상을 내리치며 “지도부 자격이 없다”고 했다. “개인으로 있는 자리가 아니지 않나”(박홍근 원내대표), “앞으로 지도부와 상의를 하고 발언을 했으면 좋겠다”(전해철 의원)는 훈수도 이어졌다. 당의 대표 격인 비대위원장이 아닌 ‘정치를 모르는 젊은 여성’을 대하는 태도다. 이어진 “그럼 저를 왜 뽑아서 여기다 앉혀놓았냐”는 박 위원장의 반박은 당의 들러리에 머물지 않겠다는 강력한 입장 표명이다.

박 위원장은 이번 ‘쇄신 파동’ 이전부터 당 안팎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왔다. 조국 전 장관에 대한 입시비리 사과 요구, 검찰 수사-기소 분리법안 졸속 처리 반대, 최강욱 성희롱 발언 엄정 대처 등 강성 지지층의 요구와 다른 목소리를 낸 탓이다. 비대위원장 취임 초반에는 “대표실에 수행비서와 일정비서, 차량 제공 등 의전을 요구했다”는 흑색선전에 시달렸다. 여기에도 ‘젊은 여성이 비대위원장’이라는 고까움이 깔려 있다.

박 위원장은 2030 청년 여성의 상징적인 존재다. 디지털성착취 집단인 ‘엔(n)번방’을 파헤친 그는 지난 대선 막판 국민의힘의 여성혐오에 맞서 2030 여성들을 민주당 쪽으로 결집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선 패배 뒤 비대위원장으로 영입된 데는 청년 여성의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는 표면적 이유가 있었지만, 지방선거에서 그의 ‘이미지’를 활용하겠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박 위원장을 향한 비난에 대해 “쇄신의 ‘마스코트’로 활용하려던 것인데, 마스코트가 진짜 쇄신하겠다고 나서니 당황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민주당은 거센 책임론과 쇄신 요구에 다시 직면할 것이다. 박 위원장에게 책임이 덧씌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박 위원장이 사과하게 만든 당의 현실 때문에 선거가 힘든 것”(박용진 의원)이라는 분석이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박 위원장이 쏘아올린 쇄신 방향이 민주당 변화의 시작이 돼야 한다. ‘박지현 때문에’ 민주당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박지현 덕분에’ 민주당에 희망이 있다고 봐야 한다. 지금 민주당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박지현’이다.

id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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