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지도자의 심리

한겨레 2022. 5. 2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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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아베 신조 일본 총리. EPA 연합뉴스

[세계의 창] 야마구치 지로 | 일본 호세이대 법학과 교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지 3개월이 지났다. 연일 전해지는 비참한 희생에 가슴이 아프다. 우크라이나를 정복하겠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야망은 사실상 실현이 불가능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희생자가 더 늘어나기 전에 하루빨리 전쟁이 중단되길 바랄 뿐이다.

전쟁이 이렇게 장기화하고 러시아군 가운데서도 많은 희생자가 나오고 있는 것은 푸틴 대통령의 큰 오판 때문이다. 하지만 고전을 거듭해도 전쟁을 멈출 기미는 없다. 여기서 전쟁을 중단하면 애초 무엇을 위해 전쟁을 벌였고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는지 모르겠다는 비판적 여론이 터져나와 푸틴의 정치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현재 세계 최강의 독재자이지만 독재자는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는 것이 정치적 죽음을 의미한다는 큰 약점이 있다. 엄청난 희생에도 잘못된 정책을 지속하는 것이 독재자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이런 정책 결정의 패턴은 남의 일이 아니다. 90년 전 당시 일본 지도자들은 만주사변 이후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모른 채 중국 대륙에서 진흙탕 같은 전쟁을 치렀다. 전후 일본은 이런 실패를 반성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전쟁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오히려 과거의 전쟁을 미화하고 지도자를 영웅시하는 흐름이 확산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일본은 독재국가는 아니다.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본 정책 결정자들은 자신들의 오판은 인정하지 않고 경제운영과 관련해 잘못된 정책을 질질 끌고 있다.

2013년 제2차 아베 신조 정권이 대대적인 금융완화를 시작한 이후 일본은행은 거액의 국채를 사들여 저금리 정책을 이어가면서 엔화 가치 하락을 유도해왔다. 이런 조처들은 분명 수출기업에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엔화 약세로 얻은 이익을 내부 유보나 자사주 매입을 위해 사용했다. 경제성장의 선순환을 위한 임금인상이나 설비투자로 이어지지 못했다.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세계적인 자원·식량 등 원자재 가격 오름세가 계속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엔화 약세까지 겹치면서 수입 물품 가격이 더 급등했고, 식품·에너지 등 전반적인 물가상승으로 이어져 소비자들은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미국·유럽 금융당국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금리를 올리는 선택지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금리인상은 국채 이자 비용을 증가시켜 재정적자가 한층 확대된다. 금리가 오르면 국채 가격은 하락하고 500조엔을 넘어서는 국채를 보유하고 있는 일본은행은 거대한 손실을 보게 된다. 그럴 경우 일본은행이 채무 초과에 빠져 신용을 잃을 수 있다. 즉 일본의 재정·금융은 파탄의 고비에 와 있는 것이다.

현재 물가상승률은 2%를 넘어설 기세여서 금융완화를 이어갈 이유도 없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엔화 약세가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금융완화의 깃발을 내리지 않고 있다. 또 아베 전 총리가 일본은행은 정부의 자회사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지난 9년 동안 정부와 일본은행이 하나가 돼 추진한 금융완화, 엔화 약세 정책이 옳았다는 것을 강변하려는 의도다. 그러나 정책 결정자들의 체면을 지키는 것이 지상목표가 된다면, 잘못된 정책은 언제까지나 계속되고 결국 국민이 큰 피해를 보게 된다.

앞서 일본은 독재국가가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야당의 존재감이 미미하고 정부 정책에 대한 검증이나 견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다. 지난해 가을 중의원 선거 이후 일본 언론에서는 야당은 비판만 한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잘못된 정책으로 나라가 파탄날지도 모르는 위기에 야당은 정책을 제대로 비판해야 한다. 비판을 꺼리는 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도자의 발상이고, 비판을 봉쇄하는 것은 패배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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