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합의라는 기만 [세상읽기]

한겨레 2022. 5. 29. 18: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읽기]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단식농성 46일째인 지난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농성·단식투쟁 마무리 기자회견에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는 그날까지 싸워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세상읽기] 류영재 | 대구지방법원 판사

최근 선고된 임금피크제 관련 대법원 판결에서 확인됐듯이, 차별은 ‘합리적 이유 없이 같은 것을 다르게 취급하거나 다른 것을 같게 취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임금은 본질적으로 노동의 대가인데 업무에 있어 양과 질의 변화가 없고, 정년연장 등 노동조건의 보상도 없으며, 급여 하락을 설명할 다른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나이만을 기준으로 급여를 일률적으로 삭감하면 노동과 무관한 나이를 이유로 노동의 대가인 급여를 다르게 정하는 차별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에서는 백인과 흑인이 이용하는 버스를 분리하거나 백인 아이와 흑인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분리하면 이를 대중교통이나 교육의 본질과 무관한 인종을 이유로 같은 시민을 다르게 취급하는 행태로서 차별이라고 본다.

한편, 다른 것을 같게 취급하는 것도 차별일 수 있다. 대법원은 휠체어 이용 시민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저상버스가 필요한데 휠체어 이용 시민들과 이를 이용하지 않는 시민들 사이의 버스 탑승을 위한 설비조건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휠체어 이용이 불가능한 버스만을 일률적으로 운행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휠체어 이용 시민들에게 대중교통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어 차별이라는 취지로 판단했다.

이처럼 예를 들어 설명하면 간단해 보인다. 그러나 차별을 금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차별인지 판단해야 하고 무엇이 차별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달리 또는 같게 취급하는 데에 합리적 이유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쉽지 않은 과정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과정 덕분에 차별금지는 민주주의를 충실히 구현하고 사회구성원들의 자유와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밑바탕이 된다. 민주주의 사회는 시민의 자기지배가 실현되는 사회, 공동체 내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의미한다. 여기서 지배자는 왕이나 귀족, 독재세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 내 다수의 의사에 따라 소수의 자유와 권리가 본질적으로 박탈당하고 그 구조가 고착되면, 소수에게 그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구분되는 비민주적인 사회나 다름없게 된다. 차별은 차별받는 이들에게 사회의 비민주성과 말로만 보장되는 자유와 권리의 폭력성을 경험하게 한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순간 사회생활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체념하게 만드는 사회,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반대하거나 죄악시하거나 질병 취급하는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사회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출근길 지하철을 이용하면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비시민으로 취급하고, 시설에서 자립해 삶을 꾸려나갈 자유와 권리는 가족의 무한 희생 없인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회는 얼마나 비민주적인가.

차별금지는 이처럼 우리 사회에 숨겨진 합리적 이유 없는 구분, 배제와 소외를 드러내고, 차별받는 이들이 과연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합당하게 존중받으며 자유와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받고 있는지 검토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사회를 좀 더 민주적으로 만들고 좀 더 많은 이들의 자유와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한다. 이는 헌법이 정하는 가치이므로 차별금지에는 이미 규범적인 사회적 합의가 마련돼 있는 셈이다. 한편 차별은 사회 안에 고착된 선입견, 관행, 제도 속에 존재한다. 이런 차별을 금지하기 위해서는 차별이 고착된 사회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무엇보다 차별받는 이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 그들을 차별하는 사회의 허락이 필요하진 않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권리의 보장은 시혜와 배려가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로 유엔 사회권협약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즉시’ 차별금지를 위해 조치할 의무를 갖는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시민들은 국회청원을 하고, 전국을 걷고, 밥을 굶었지만 국회는 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법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차별금지에는 이미 규범적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 차별금지가 차별하는 사회의 동의를 얻어야만 하는 사안도 아니다. 따라서 나는 국회가 말하는 ‘사회적 합의’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문제는 국회의 변명 때문에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을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국회는 사회적 합의란 그럴듯한 말로 시민을 기만하지 말고 선거에서 질까 봐 차별금지법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을 솔직히 밝힌 뒤 책임을 지기 바란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