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석의 팔레트] '상시적 망각'에 맞서

한겨레 2022. 5. 2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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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레킷벤키저, 애경산업, 에스케이(SK)케미칼, 에스케이이노베이션, 지에스(GS)리테일,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쇼핑, 엘지(LG)생활건강.

가습기살균제 피해 조정안에 참여한 가해기업 명단이다.

4월30일에 갱신된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온라인 상황판에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신고자가 7712명이며 사망자는 1773명으로 확인됐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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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석의 팔레트][‘가습기 살균제’ 파동]

지난달 6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열린 무책임한 가습기살균제 살인기업 옥시와 애경 규탄 기자회견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유족들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현석 |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옥시레킷벤키저, 애경산업, 에스케이(SK)케미칼, 에스케이이노베이션, 지에스(GS)리테일,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쇼핑, 엘지(LG)생활건강.

가습기살균제 피해 조정안에 참여한 가해기업 명단이다. 산발적으로 발병한 원인미상 폐질환이 하나의 사건으로 인지된 것은 2011년. 이후 10년 만에 민간 조정위가 출범해 올해 4월, 7천여명에게 지원금을 일시 지급하라는 최종안이 나왔다. 그러나 옥시와 애경은 분담비용이 많고, 기업에 더는 책임을 묻지 않겠는다는 ‘종국성’이 없다는 이유로 조정안 수용을 거부했다. 나머지 7개 기업은 조정위 활동기한 연장에 동의했지만 재원분담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두 기업이 빠진 만큼 실질적인 피해구제책 마련은 난망하다. 조정위 활동기간 연장 뒤에도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 조정안은 폐기될 수 있고, 조정이 무산되면 민사소송으로 넘어가야 한다.

조정기간 연장과 소송. 두 방법 모두에서 저당 잡히는 것은 피해자의 ‘시간’이다. 특히 소송으로 갈 경우 재판은 반드시 길어지게 된다. 대표적인 가습기살균제 성분(PHMG와 CMIT/MIT)이 호흡기 질환을 일으킨다는 것은 이제 논란의 여지가 없으나 환경성 질환 특성상 원인물질 외에도 수많은 교란인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10여년을 기다린 피해자들이 또 기약할 수 없는 시간 속에 갇혀야 할 때 ‘시간은 공평하다’는 말은 요식에 불과하다. 불공정한 시간싸움으로 정의가 지연된 사이 개개인은 쇠약과 죽음을 겪는다. 섬유화성 폐질환으로 투병하다 지난 3일에 별세한 배구 선수 안은주씨 사례처럼 말이다.

4월30일에 갱신된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온라인 상황판에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신고자가 7712명이며 사망자는 1773명으로 확인됐다고 적혀 있다. 안은주씨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확인된 피해사망자는 이제 1774명으로 늘었다. 이 숫자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얼마나 늘어날지 가늠되지 않는 것은 가습기살균제 사용으로 생명 또는 건강상 피해를 입었을 ‘건강 피해자’의 규모가 49만~56만명으로 추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7천여명에 대한 (보상도 아닌) 지원으로 사건을 종결시켜달라는 요구를 우리는 무어라 불러야 할까. 사전을 아무리 뒤적여보아도 ‘생떼’보다 적확한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세계 최초의 살생물제(바이오사이드) 집단재해사건이다. 동시에 생활제품으로 인한 세계 최대의 환경성 질환이기도 하다. 초유의 재난임에도 여태껏 이 사건에 우리 사회의 관심은 적기만 했다. 최소 9개 가해기업이 제작·생산·가공·유통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초점이 분산된 것이 하나의 이유일 터. 여기에 고분자중합체의 상온 휘발성이 낮다는 이유로 흡입독성 안전성 평가를 건너뛴 정부의 책임까지 맞물려 있으며, 광고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언론의 의도적 무관심도 한몫했을 것이다.

반면 상당수 피해자들은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탓에 스스로 피해자인지 자각하지도 못했다. 환경성 질환의 경우 당사자가 원인물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알아낼 방법은 요원하다. 기억은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추후에 자각하더라도 그 기억은 심문받는다. 피해신고자와 추정된 건강피해자 규모가 현격히 차이 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건이 이런 식으로 흩어져 주변부로 밀려나버리면 망각에 직면한다. 망각은 단순히 사건을 잊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안된 최소한의 장치들, 즉 징벌적 손해배상과 안전성 평가 강화 같은 의제들도 동력을 잃게 된다. 그 결과 발생하게 될 미래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상시적인 망각에 맞서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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