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칼럼] 흔들리는 미국의 리더십, 불안한 세계질서

한겨레 2022. 5. 29.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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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인 칼럼]바이든 행정부는 규범과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질서의 회복, 동맹과 다자협력 강화를 주창하고 나섰다. 미국 국력의 한계를 인지하며 동맹과 우방과의 긴밀한 협력으로 새로운 지정학·지경학적 도전에 맞서겠다는 이야기다. 미국 국력이 이전보다 제한된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주요 과제를 동맹과 우방에 분담하는 일종의 '외주 패권국'(outsourcing hegemon)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한·일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안팎의 불행을 접하게 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4일(현지시각) 저녁 백악관에서 연설에 나서며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미국에선 이날 텍사스 유밸디의 한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으로 21명이 숨졌고, 북한은 25일 아침 동해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포함한 세발의 탄도미사일을 쏘며 도발을 이어갔다. 중·러 역시 전날 동해 쪽 한국방공식별구역(카디즈)에 전략폭격기를 띄우며 미국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문정인 | 세종연구소 이사장

패권은 국제정치에서 한 국가에 힘이 집중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패권국이 힘을 통해 세계를 지배할 때 제국이 탄생한다. 반대로 그 지위를 이용해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어 국제사회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마련할 때는 패권적 리더십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오로지 미국만이 그런 역할을 해왔다. 안보와 자유무역이라는 공공재를 제공하는 미국이라는 거인이 있었기에 세계질서의 구조적 안정이 가능했다.

냉전이 끝나면서 미국에 대한 기대는 더 커졌다. 이에 대한 화답은 1991년 9월23일 부시 시니어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이 더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추구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 서로 공유된 책임과 염원을 바탕으로 하는 팍스 유니버설리스(Pax Universalis)를 추구할 것입니다.” 미국 자신만의 패권이 아니라 유엔과 더불어 세계평화를 모색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미국이 단극 구도의 패권적인 우위를 누리고 있음에도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통해 세계평화와 공동번영을 만든다는 ‘자애로운 패권국’의 비전이었다.

그러나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의 반응은 달랐다. 미 심장부에 대한 알카에다의 테러 공격과 무고한 시민의 희생은 미국 정부와 국민의 분노를 솟구치게 했다. 네오콘의 영향을 받은 부시 주니어 대통령은 미국적 가치를 기준으로 온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도덕적 절대주의, 유엔과 다자주의 질서를 부인하는 패권적 일방주의, 테러의 징후가 보이기만 해도 선제타격을 가하겠다는 공세적 현실주의로 일관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은 이런 맥락에서 이뤄졌다. 자애로운 패권국 미국이 고압적이고 보복적인 패권국으로 변했음을 의미한다.

2009년 1월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는 새로운 외교의 시작을 알렸다. 도덕적 절대주의에서 공감과 관용의 외교로, 일방주의에서 다자주의 협력으로, 동맹과 우방국들과의 협력을 통해 세계 주요 현안들을 풀어가겠다는 자유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을 표방했다. 그러나 오바마 외교에서 패권적 리더십의 면모를 찾기는 어렵다. 이라크에서는 철군했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계속 잔류했고, 취임 초부터 추진했던 ‘핵무기 없는 세계’와 ‘핵 선제불사용(no first use)’이라는 구호는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오히려 중국의 부상을 이유로 아시아재균형 전략을 전개하며 냉전 회귀 조짐마저 보였다.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동맹 관리를 통해 미국의 우월적 지위를 고수하려는 ‘헤징 패권국’이라는 이중적 면모였다.

뒤이은 트럼프 대통령은 애초부터 패권적 리더십에 관심이 없었다. ‘미국 우선주의’에 기초해 다자주의 협력을 거부하고 거래주의 시각에서 동맹을 무임승차국으로 간주했다. 미국이 더는 세계경찰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겠다는 그의 발언에서 이는 분명해졌다. 트럼프는 ‘강한 미국’을 표방했지만, 이는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일방적인 국익을 위해서였다. 미국은 이제 패권적 지도국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초강대국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 역사상 가장 심대한 외교적 일탈이었다.

열흘 전 방한한 바이든 대통령은 어떤가. 바이든 행정부는 규범과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질서의 회복, 동맹과 다자협력 강화를 주창하고 나섰다. 미국 국력의 한계를 인지하며 동맹과 우방과의 긴밀한 협력으로 새로운 지정학·지경학적 도전에 맞서겠다는 이야기다. 중국과 러시아 같은 권위주의 국가축에 대항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 연합을 가동하는 한편, 미국의 경쟁력 회복과 경제안보를 위해 동맹과 우방의 적극적인 동참과 공헌을 권유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포괄적 전략동맹 개념이 가진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달리 보면 미국 국력이 이전보다 제한된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주요 과제를 동맹과 우방에 분담하는 일종의 ‘외주 패권국’(outsourcing hegemon)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미국의 패권적 리더십은 세계평화와 번영, 그리고 안정에 필수불가결하다. 국내외적 변화와 도전에 따라 그런 지향점이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40년간 미국이 보여준 리더십은 때때로 변칙적이었고, 그렇게 중심이 흔들릴 때마다 세계는 불안해졌다. 부시 시니어 대통령이 내걸었던 ‘자애로운 패권국’의 이상은 이제 불가능해진 것일까. 다름에 대한 배척과 우리만의 안보가 아니라 포용과 공감, 공동안보와 평화를 지향하는 대전략에 대한 기대는 사라진 것일까. 여전히 그에 필적할 만한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 위에서, 협력적 질서와 세계의 미래를 제시하는 미국의 담대한 비전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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