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을 자처한 영조, 여섯살 영친왕..'조선의 이상을 걸다, 궁중 현판'전
현판(懸板)은 ‘글씨나 그림을 새겨 문 위나 벽에 다는 널조각’이다. 주로 건물 이름을 알린다. 조선 왕조의 궁중 현판 기능과 내용은 더 다양하다. 건물 성격과 기능을 담은 단순 정보부터 왕 개인의 감상에다 국가 이념까지 두루 새겨 걸었다. 시나 좋은 글귀를 새긴 일종의 문예지 역할도 했다.
궁중 현판 770점은 2018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에 등재됐다. 서울 청운효자동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의 이상을 걸다, 궁중 현판’전(8월 15일까지, 무료)은 궁중 현판을 종합해 보여주는 첫 전시다. 동명의 전시 도록에서 궁중 현판의 특징과 내용 등을 정리했다.
■금박 글씨에 테두리 칠보의 위계
‘널조각’을 어떻게 꾸미느냐에 따라 위계가 나눠졌다. 나무 종류, 테두리 유무, 장식 무늬, 바탕판·글씨 색상과 기법을 달리해 위계를 드러냈다. 위계가 높은 현판은 피나무(17~18세기)와 잣나무(19~20세기) 판에다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만들고 구름·용머리·봉황 머리 모양 등을 장식했다. 테두리엔 길상(吉祥) 의미를 담은 칠보(七寶), 연화(蓮花) 같은 무늬를 썼다. 글씨 색은 금박을 붙인 금색이 최고로 높았다. 최고 위계 현판은 ‘임금이 손수 쓴 글씨’인 ‘어필(御筆)’ 현판이다.
이런 현판 중엔 고종 어필의 ‘경운궁 현판’을 들 수 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 사용한 임시 정전인 즉조당에 건 현판이다. 경운궁(慶運宮)은 ‘경사스러운 운수가 가득한 궁’이라는 뜻이다. 금색 글씨를 쓰고, 테두리 칠보 무늬 장식을 했다.
대조적인 게 ‘수라간 현판’(19세기 후반 추정)이다. 수라간은 ‘임금의 진지를 짓던 주방’이다. 전시엔 경복궁 안 여러 수라간 중 한 곳에 걸었던 현판이 나왔다. 테두리가 없다. 나무 질감이 거칠게 드러나는 바탕에 검은색으로 글씨를 썼다. 가로가 긴 현판이 대부분인데, 이 현판은 특이하게 세로(68.4 ㎝ )가 길다.
■바탕에 검은색을 칠한 이유는
<경복궁 영건일기>는 고종 대 경복궁 중건 과정을 기록한 일기다. 1865년(고종 2) 4월부터 공사가 끝나는 1868년(고종 5) 7월까지 매일 상황을 수록했다. 1876년 4월 21일자 기록에 현판의 바탕을 검은색으로 칠한 이유가 나온다.
“교태전과 강녕전의 현판은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묵질금자, 墨質金字)이다. 각 전당이 모두 검은 바탕인 것은 불을 제압하는 이치를 취한 것이다(交泰殿 康寧殿 墨質金字 各殿堂 皆爲墨質 取制火之理)”.
검은색은 오행(五行 )중 물(수, 水)에 해당한다. 화재에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이 일기엔 근정전, 사정전, 수정전, 자선당, 경회루 등도 검은색 바탕으로 칠했다고 적혀 있다.
■현판을 가장 많이 남긴 영조
어필 현판은 “왕의 글씨를 드높이는 데 적합한 매체”(이상백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다. 임금이 쓴 어필 현판은 궁중 현판의 약 2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 영조가 현판을 가장 많이 남겼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선조, 숙종, 영조, 정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의 어필 현판을 소장하고 있다. 영조 어필 현판은 소장 현판 775점 중 85점이다. 이 연구사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고 어필을 현판으로 남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내용도 다양하다. 종묘 망묘루 벽에 건강이 좋지 못해 제사를 직접 지내지 못한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한 시를 새겨 달았다. 재정을 관리한 호조 현판에는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힘을 축적하라(均貢愛民 節用蓄力)’는 내용을 새겼다.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현판은 1726년(영조 2) 영조 서른 셋에 생모인 숙빈 최씨(1670~1718) 사당을 참배하고 지은 칠언절구 시다. 가장 늦은 시기 현판은 1775년(영조 51) 영조 여든 둘에 숙종 계비 인원왕후(1687~1757년)를 추모하며 지은 글이다. 각각 자신을 낳고, 지지해준 어머니를 추모한 것이다.
영조 현판 주제 중 두드러지는 건 ‘숙종 추모’다. 숙종이 사직단에서 봉행한 제향과 같은 달도 아니고 같은 날에 의미를 부여한 시도 남겼다. 억지스러운 집착을 두고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지만 경종의 이복동생으로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의 신분, 즉 방계에서 왕위를 이었다. 따라서 영조는 숙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자신을 계속해서 확인받고자 했던 것”(이상백)으로 보인다.
■현판에 담긴 왕권 의지
영조는 ‘강력한 왕권’ 의지도 담았다. ‘건구고궁(乾九古宮)’ 내력을 담은 어필현판엔 자신을 ‘비룡(飛龍)’에 비유했다. 정조 어제(御製) 현판인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은 1798년(정조 22) 제작한 것이다. 정조의 호로 ‘온 시냇물에 비친 밝은 달의 주인’을 뜻한다. “만 개의 시냇물에 달이 비추듯 백성과 신하에게 강력한 왕권을 미쳐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 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왕이 개인 감상을 담은 현판도 있다. 숙종이 1694년(숙종 20)에 연못을 바라보며 느낀 감상을 읊은 시를 새긴 현판이 그 중 하나다. “웃으며 단청 입힌 난간에 기대어 작은 연못에 임하니(笑倚畫欄臨小溏)/ 조용한 정원에서 일없이 맑은 햇살을 즐기네(閑庭無事玩澄光)/ 옥빛 섬돌에는 한 쌍의 채색된 오리가 느릿느릿 거닐고(玉砌緩行雙彩鴨)/ 어린 물고기들은 절로 득의하여 양양하게 노니네( 魚兒自得意洋洋)”.
■여섯 살에 쓴 현판 글씨
대안문(大安門) 현판은 경운궁(현 덕수궁) 동쪽 정문에 걸렸다. ‘124.3×374.0㎝’으로 전시작 중 가장 크다. 1899년 제작했다. 1904년 경운궁 화재 뒤 1906년 4월 수리 때 ‘큰하늘’이라는 뜻의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었다.
현판 글씨를 쓴 사람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쓴 이가 영친왕이다. 여섯 살 때인 1902년 쓴 ‘수진지만(守眞志滿)’ 현판이 전시에 나왔다. ‘참됨을 지키면 의지가 충만해진다’는 뜻이다.
글씨체 중에선 글자 획이 반듯하고 알아보기 쉬운 ‘해서(楷書)’가 가장 많이 쓰였다. 궁중 현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백제 의자왕 때 충신을 모신 사당인 의열사 내력을 새긴 의열사기(義烈祠記) 현판이다. 1582년 제작했다.
■한석봉과 건륭제가 쓴 글씨
의열사기 현판은 류성룡(1542~1607)이 글을 짓고, 석봉 한호(1543~1605년)가 글씨를 썼다. 현판 뒷면에 ‘만력 10년 임오년(1582년) 2월에 걸다. 생원 한호가 썼다’는 음각이 새겨져 있다.
궁중 현판 글씨 중엔 중국인 것도 여럿이다. ‘동번승미(東藩繩美)’ 현판(1778년 이후)은 중국 청나라 6대 황제인 건륭제 글씨로 제작했다. <정조실록> 1778년(정조 2) 9월 11일 기사에 청나라에 간 사신 이은(1722~1781년)이 건륭제의 친필 ‘동번승미’를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동번승미는 ‘동쪽의 번국(藩國·변방의 제후국)이 아름다움을 이었다’는 뜻이다. ‘조선의 이상을 걸다, 궁중 현판’ 특별전은 100여 점을 전시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에 등재된 81점도 내놓았다. 국보 <기사계첩(耆社契帖)>(1719년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만든 첩 형태의 책) 등도 전시한다.
전시는 ‘머리말(프롤로그) 궁중 현판, 우리 곁으로 내려오다’ ‘1부 만들다’ ‘2부 담다’ ‘3부 걸다’ ‘마무리(에필로그) 현판, 시대를 넘어 함께하다’ 등 5부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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