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이 부서진 인생.. 겹겹이 쌓이는 절망 [밀착취재]

하상윤 2022. 5. 29.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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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피해 '끝나지 않은 고통'
"문제 해결" 정부 약속 굳게 믿었는데.. 어느새 1770명 넘게 하늘로 떠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조순미(54)씨. 조씨는 현재 가해 기업 중 하나인 SK그룹 본사 앞에서 책임과 사과를 요구하며 세 달째 천막 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 이후 급격한 퇴행 증상을 겪으며 지체장애 판정을 받았고, 스스로 걸을 수 없게 됐다.
“은주 언니 방금 돌아가셨어요, 우리 언니 너무 외롭게 가서 어떡해요?”
지난 3일 새벽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조순미(54)씨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또 다른 피해자인 고 안은주씨의 임종을 전했다. 안씨는 55번째 생일 바로 다음 날 병상에서 죽음을 맞았다. 2018년 2월 가습기살균제 참상을 기록한 기획기사 ‘빼앗긴 숨·행복… 지옥같은 삶에 고통만 남았다’를 취재하면서 두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 기사가 나간 뒤에도 병원에서 만나 식사도 하고 안부도 나눴다. 3일 오전 안씨의 빈소가 차려진 경남 함안으로 향하는 길에 조씨를 만났다. 산소발생기를 코에 낀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4년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조씨는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됐다고 한다. 그사이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안씨를 비롯한 피해자 480여명이 고통 끝에 세상을 떠났고, 문제 해결을 약속했던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고 청와대를 떠났다. 2022년 4월 기준, 공식 사망자수는 1770명을 넘겼다.
지난 3일 경남 함안에 마련된 고 안은주씨의 빈소를 찾은 조순미씨가 안씨의 친언니인 희주씨를 만나 오열하고 있다. 
2017년 청와대가 주최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간담회’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조순미씨와 만나 대화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은주야, 이제 너 좋아하는 배구장 가서 공놀이도 실컷 하고, 바다로 산으로 가서 맑은 공기 시원하게 마셔. 다음 생애엔 언니랑 남들처럼 4500원짜리 커피 마시면서 산책도 하고, 길거리에서 떡볶이랑 튀김도 사 먹자. 남들처럼 손잡고 여행도 떠나고, 너 좋아하는 노래방도 가자. 남들처럼, 남들처럼.”
안씨의 임종을 지켰던 친언니 안희주(57)씨의 말이다. 안은주씨는 2008년부터 3년간 옥시레킷벤키저의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을 사용한 뒤 원인 모를 폐렴을 앓았다. 2010년 봄 그는 도민체전이 열린 배구장에 주저앉았다. 배구선수 출신인 안씨가 마지막으로 밟은 코트였다. 2015년 10월 첫 번째 폐 이식을 받았다. 2년쯤 지났을까. 이식받은 폐는 건강했지만, 안씨의 몸이 거부했다. 갖은 약을 다 써 봤지만 소용없었다. 폐 기능이 계속 떨어지며 다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오랜 투병생활로 부채가 수억 원으로 불어났다. 2019년 두 번째 폐 이식을 받았지만 경과가 좋지 못했다. 하반신이 마비되면서 욕창에 시달렸고, 목에 산소발생기를 삽관한 뒤로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필담(筆談)이었다. 안씨의 딸 손아영(20)씨는 “엄마가 얼마나 아픈지 곁에서 봐 왔고,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걸 안다”면서 “이러한 비극을 나 말고 다른 이들이 똑같이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슬프고 힘들다”고 말했다.
2018년 고 안은주씨(왼쪽)의 병실을 찾아온 조순미씨 모습.
이통희(41)씨네 가족이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를 찾았다. 아들 한솔(11)군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뒤 운동장애, 주의력장애, 발달장애, 천식 등을 겪고 있다.
조순미씨는 2017년 청와대가 주최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간담회’에 초대받았을 당시를 회상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책임져야 할 기업이 있는 사고지만, 정부도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할 수 있는 지원을 충실히 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조씨는 현재 가해 기업 중 하나인 SK그룹 본사 앞에서 책임과 사과를 요구하며 세 달째 천막 농성을 이어 오고 있다. 그는 “국가는 조금의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고, 가해 기업은 그런 국가 뒤에 숨어서 시간 때우기만 하고 있다”면서 “그러는 사이 가중되는 경제적·신체적 고통은 고스란히 피해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되었다”고 토로했다. ‘이마트 이플러스 가습기살균제’와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애경 홈크리닉 가습기메이트’를 복합 사용했던 조씨는 중증 천식과 저감마글로불린혈증, 쿠싱병, 근무력증 등 각종 난치성 질환을 앓았고, 현재는 배뇨·인지·지체 장애 등 각종 퇴행성 질환까지 더해져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질병은 단순히 폐질환에 국한되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3년간 가습기살균제(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에 노출된 민승희(14)군은 만성 폐렴과 더불어 만성 간염, 간경화, 운동장애, 섭식장애, 우울증 등을 겪어 왔다. 민군은 “14년 동안 내내 속이 울렁이고 메스꺼웠다”면서 “다른 친구들처럼 걷고 뛰지 못하니 마음이 움츠러들었다”고 말했다. 민군의 어머니 채경선(47)씨는 “폐 손상에 국한하는 현행 피해자 판정 시스템 안에서 승희는 피해가 경미한 사람이다”라며 “일상을 모조리 빼앗긴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덧붙였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김미희(64)씨. 김씨는 2005년 가을부터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뒤 급성 폐렴을 앓았고 이듬해에 천식 진단을 받았다. 이후 이명을 앓은 뒤 왼쪽 귀의 청력 대부분을 상실했고, 녹내장의증을 겪으며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채경선(47)씨 가족이 과거에 거주했던 안산 집을 다시 찾았다. 이들은 이 집에서 살았던 반년을 시작으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간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됐다. 왼쪽부터 민동우(47)씨, 민초희(13)양, 민승희(14)군, 채씨.
지난 3일 경남 함안에 마련된 고 안은주씨의 빈소를 찾은 조순미씨가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사람들은 폐뿐만 아니라 다른 장기에서도 손상이 일어난다. 일부 피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세포 노화 양상을 보이는데, 나이가 들어서 생기는 퇴행성 질환을 조기에 겪게 되는 것이다. 80∼90대에 나타나는 증상이 50대 피해자들에게, 70∼80대에 이르러야 경험하는 노화 현상이 10∼20대 피해자들에게 나타날 수 있다.”

임종한 인하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임 교수는 “광범위한 퇴행성 질환과 더불어 생각지도 못한 장애, 설명되지 않는 증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면서 “가해 기업이 종국성을 거론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 발생의 여지를 틀어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임 교수는 “미나마타 사건에서 합의가 이뤄지는 데 40년 가까이 오랜 시간이 걸린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사진 하상윤 기자 jonyy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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