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나의 것] 하이브의 엉성한 쉴드치기가 불러온 파문

김윤정 칼럼니스트 2022. 5. 29.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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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김윤정 칼럼니스트]

데뷔 전부터 학교폭력 가해자로 지목됐던 르세라핌 멤버 김가람이 데뷔 18일 만에 활동을 중단했다. 하지만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르세라핌 소속사인 하이브 측이 김가람 활동 중단 이유를 “김가람이 입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함”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하이브 측은 김가람이 중학교 1학년이던 2018년 학교폭력위원회로부터 5호 처분을 받은 사실을 인정했지만 김가람을 학교 폭력의 일방적 가해자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왜곡된 주장'이며, 해당 사건을 “먼저 큰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가 학폭위를 요청하면서 되려 피해를 입은 친구를 위해 나선 김가람이 학폭위 가해자로 지목된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A씨가 김가람의 친구가 속옷만 입고 찍은 사진을 무단으로 촬영해 SNS에 게재했고, 이에 격분한 김가람과 친구들이 항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김가람은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린 정의의 사도이며, A씨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사건의 원인 제공자이면서 여전히 김가람을 학폭 가해자로 지목하고 있고, 학폭위는 이 같은 사실을 모두 파악하고도 합당한 처벌을 내리지 않은 셈이다. 주변 현직 교사들에게 물어봤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 아이돌 그룹, 르세라핌.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학교폭력 의혹이 제기된 김가람. 사진=쏘스뮤직 제공

교사들은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학폭위는 자치 성격이 강하고, 참여하는 전문가 성향이 달라 학교마다 조치 강도가 다르지만, 가해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 데 5호 처분이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학폭 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는 한 7년 차 교사는 “교직 생활 동안 5호 처분이 내려진 경우는 한 번도 못 봤다. 쉽게 내려지는 처분이 아니”라고 했고, 또 다른 10년 차 교사는 “하나의 사건이라도 연루자가 여럿이면 가해 정도에 따라 처분이 다르게 나온다. 하이브 주장대로 김가람이 단순 가담으로 5호를 받았다면, 사안 자체가 매우 심각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하이브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러 언론에 인용된 현직 교사, 변호사들의 의견도 모두 일치하는 것을 보면 이게 교육계의 시각이라 봐도 무방할 듯싶다.

하이브의 입장문이 문제인 것은, 하이브의 김가람 옹호 논리가 전형적인 가해자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하이브는 사건 발생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전가하고, 학폭위가 '학폭'이라 인정한 잘못을 정당화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부모님 다음으로 많은 영향을 받는 존재가 아이돌이라는데, 아이돌을 만드는 회사에서 이토록 노골적으로 학교폭력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학교 폭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최근 몇 년간 아이돌 그룹, 스포츠 스타 등 유명인의 학폭 폭로를 지켜봤다. 논란이 거듭될 때마다 우리 대중은 더 이상 학폭을 '철없는 시절의 장난'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국내 최대 규모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이라는 하이브의 폭력 감수성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학창 시절 싸움 좀 했다는 과거를 자랑인 양 떠들던 1990년대에 1세대 아이돌 시절에 멈춰선 것은 아닌가.

학폭은 학교 현장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다. 피해자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평생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들도 많다. 형법상 공소시효가 지나더라도 피해자가 겪는 '고통의 공소시효'는 쉬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이브의 입장문은 학창 시절 직·간접적으로 학폭을 경험한 이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학폭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퍼붓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이브의 뒤처진 폭력 감수성과 무지가 뒤범벅된 입장문은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했고, 대중은 김가람의 잘못에 대해서만 더 조목조목 알게 됐다. 하이브는 '소속 연예인 보호'라는 목표도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이 유해한 입장문은 그래서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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