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더 겸손하고 더 다정한 나를 만나러 갑니다

한겨레 2022. 5. 2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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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김남희의 걷다 보면]김남희의 걷다 보면 카미노 데 산티아고 ①
포르투~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내륙 240km 카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자가 된 '방과후 산책단'
매 순간 고통스러운 환희 경험
카미노 표지석. 김남희 제공

이번엔 진짜 왔다는 감이 들었다. 목이 따끔거리는 게 틀림없었다. 코로나에 걸렸다거나, 걸린 것 같다거나, 걸릴 것 같다거나, 이런 믿음으로 하루를 시작한 지 벌써 한달째. 환절기가 되면 편도선이 살짝 붓고는 하는데 하필 확진자가 매일 20만~30만명을 넘나드는 4월 초였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흰머리가 마구 늘어나고 있었다. 출국일을 열흘 남겨두고 자가진단검사를 세번, 병원에서 신속항원검사를 두번 했다. 결과는 매번 음성이었다. 이런 시기에 국외여행이라니. 심지어 ‘방과후 산책단’(책임여행을 꿈꾸며 만든 여성 전용 여행단)을 꾸려 9명을 이끌고 나가는 여행.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무렵, 친구 제이(J)씨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내 문자를 받아야 했다. “이번에는 진짜 걸린 것 같아요. 목이 칼칼해요.” “아침에 일어나니 미열이 있어요.” “침 삼키기가 힘들어요.” 성실한 그녀는 매번 진지하게 답을 보내왔다. 아닐 거라고, 혹은 증세가 어느 정도냐고. 출국일이 다가올수록 내 신경증은 심해졌다. 포르투갈 입국을 위해서는 피시아르(PCR·유전자증폭) 검사 음성 증명서를 내야 했다. 혹시나 양성이 나와 출국을 못 할 경우를 대비해 플랜 비(B)도 준비해야 했다. 그즈음은 꿈만 꾸면 악몽이었다. 비행기를 놓치는 꿈, 예약한 차가 안 나타나 하염없이 기다리는 꿈, 일행 한명이 격리당하는 꿈. 악몽에 잠을 깨 뒤척이다가 아침을 맞는 날들이었다.

폰테베드라에서 비 그친 뒤의 깨끗한 하늘. 김남희 제공

천년의 역사, 켜켜이 쌓인 눈물과 땀

그야말로 대망의 출발일. 기적처럼 방과후 산책단 전원이 음성을 받고 공항에 모였다. 31살부터 61살까지 9명의 여성. 그들의 체크인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내 여권과 음성확인서를 내밀었다.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여권이 반려되었다. “탑승이 불가능합니다. 여권에 기재된 생년월일과 달라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 정말로 병원에서 생년월일을 잘못 기재한 거였다. 이미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역시나 병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입원 병동이 있으니 누군가 있을 텐데…. 몇번의 통화를 시도하는 사이, 체크인 카운터에서 다시 종이를 내밀었다. “일단 서약서 쓰세요. 포르투갈에서 입국 거부할 경우 항공사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서약서에 사인하시면 탑승은 시켜드릴게요.” 결국 서약서에 사인하고 나니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음성확인서를 다시 메일로 받아 체크인.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코로나 시대의 여행은. 이때만 해도 순진하게 믿었다, 이 상황으로 액땜을 다 했다고.

우리가 향한 곳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 2005년에 프랑스 길을 처음 걸은 이후, 나에게는 여덟번째 카미노였다. 이번에는 포르투갈의 포르투에서 시작해 스페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향하는 240㎞의 내륙길.

나는 왜 또 카미노를 걷겠다고 나선 걸까. 혼자 걸어도 안전하니까, 지독한 길치인 나도 화살표만 따라가면 길의 끝에 다다르니까, 수많은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 비용도 많이 들지 않으니까.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카미노는 언제나 내 안의 가장 선한 얼굴을 드러내주는 길이었다. 더 겸손하고, 더 강인하고, 더 다정한 나를 만날 수 있는 길. 그렇게 걷다 보면 종교가 없는 나에게도 영적인 순간이 종종 찾아오고는 했다. 세상 모든 것에 깃들어 있는 신의 손길을 느끼고, 더 나아가 내 안의 신성을 발견하고, 그 신전에 반짝 불이 들어오는, 그런 경이로운 순간들 말이다. 나는 이 길이 지닌 평등함도 사랑했다. 이 길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다. 페레그리노(순례자).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무엇을 이루었고, 또 무엇을 잃었든 간에 그저 순례자일 뿐.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낭 하나에 넣고 먼 길을 고행하듯 가는 순례자. 그래서 이 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다른 자신을 꿈꿀 수 있다.

폰트드리마의 가로수길을 걷는 순례자들. 김남희 제공

거기에 더해 카미노가 지닌 천년의 역사성. 그 긴 세월 동안 이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상상하면 나는 길 위에서 외롭지 않았다. 그들의 사연과 눈물과 땀이 내가 걷는 발자국 아래 켜켜이 쌓여 있다고 믿었으니까. 지구 위에 이런 길이 있다는 걸 떠올리는 것만으로 나는 든든했다. ‘삶이 나에게 불친절해지면 잠시 그리로 가면 돼, 그럼 나는 다시 힘을 얻어서 돌아올 거야.’ 내게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도피처 하나가 있는 셈이었다. 쓰라린 사랑이 끝났을 때도, 전셋값 폭등에 내동댕이쳐졌을 때도, 나는 삶을 견디고 사랑하기 위해 카미노를 찾아갔다. 카미노는 나에게 은신처이자 학교이며, 병원이고 사원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걷는 순례자. 김남희 제공
순례자들을 위한 과일. 김남희 제공

순례자용 여권 첫 도장을 받고

포르투에서 맞은 첫날, 방과후 산책단에 처음 오신 분이 조용히 물었다. “작가님 출발 전에 에스엔에스(SNS)에 올리신 글들을 보면 코로나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이 산티아고 여행이 가능하려나 의심이 들 정도로. 근데 오자마자 에너지가 엄청 넘치시네요. 제가 페북으로 본 그 작가님이 아니에요. 혹시 밤에 약 드셨어요?” 멀쩡한 사람도 약 먹은 사람처럼 만들어주는 곳. 카미노의 힘이다. 이렇게나 좋은 길을, 다정한 사람들과 이토록 화창한 날씨에 함께 걷는데 어떻게 즐겁지 않을까.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내가 통과해 온 그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이들도 이제 자신의 것으로 만들 텐데, 어떻게 설레지 않을 수 있나. 게다가 내 어깨는 아직 튼튼해 내 짐을 오롯이 견뎌주고, 내 다리도 아직 강인해 이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게 해주는데! 몸을 움직여 걸음으로써 매 순간 고통스러운 환희를 경험하는 카미노. 모든 아름다운 일은 몸으로 이루어질 때 그 깊이가 달라진다는 걸 카미노는 내게 알려주었다. 카미노 자체가 내게는 마약인 셈이다. 그것도 중독성이 꽤 센!

카미노에 오를 때마다 내 원칙은 간단했다. 꼭 필요한 것들만 챙긴 짐을 스스로 메고 걷는다. 방과후 산책단 카미노 포르투갈 팀을 꾸렸을 때, 자기 몸무게의 10~15% 선에서 짐을 꾸리라고 당부했다. 내 배낭의 무게는 6㎏이었다. 첫날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숙소)에 도착해 다들 짐을 풀기 시작했을 때 내 눈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격렬히 흔들렸다. 카미노에서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물건들이 하나둘 쏟아져 나왔다. 아이패드와 마사지 볼, 수십개의 얼굴 마사지 팩, 영양갱(무려 10개!), 홍삼즙 세트, 블루투스 키보드, 종이책…. 일단 영양갱을 압수해 모두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다들 배낭의 무게가 8㎏에서 10㎏까지 나갔다. 코로나 시기라 개인마다 준비해 온 상비약의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처음부터 짐 배송을 하기로 했던 세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6명에게 말했다. 2㎏씩 짐을 덜어서 가방 하나를 꾸려 배송을 맡기라고. 배낭 무게로 인한 부상의 위험이나 피로를 조금은 줄여주고 싶었다.

걷기 시작한 첫날은 부활절(4월17일)이었다. 우리는 포르투의 성당에서 순례자용 여권 크레덴시알을 구입하고, 첫 도장을 받았다. 날은 청명했다. 들판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 꽃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담장마다 보라색 등꽃이 한창이었다. 갈매기들이 우리의 출발을 격려라도 하듯 끼룩끼룩 울며 공중을 선회했다. 많은 집이 현관 앞에 꽃잎을 흩뿌려 부활절을 축하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없었다. 첫날이라 모두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27㎞를 걷고 찾아간 숙소는 수도원의 일부인 알베르게였다. 알베르게의 오스피탈레로(자원봉사자)인 필립은 재미있는 남자였다. 유머와 여유가 넘쳤고, 혼자 10인분 저녁을 준비하는 내내 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나는 표정이었다. 그가 차려준 파스타와 샐러드, 구운 돼지고기로 저녁을 먹고 첫 밤을 맞았다.

이틀째부터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대대적인 수술이 벌어졌다. 바늘에 실을 꿰어 물집 사이로 통과시켜 실이 물을 흡수하게끔 하는 수술. 변태적인 성향인지 나는 알베르게 안에서 풍기는 온갖 냄새가 싫지 않았다. 파스 냄새, 근육통 스프레이의 냄새, 꿉꿉하고 큼큼한 땀 냄새. 내가 가진 육체성을 극단으로 깨닫게 하는 냄새였다. 살아 있는 존재임을 매 순간 확인하게 하는 냄새.

여성 자전거 순례자에게 보내는 환호. 김남희 제공

이제 운명의 짝을 만나는 건가

바셀로스의 알베르게에는 오스피탈레로가 부부였다. 폴란드인 아그네시카와 이탈리아인 빈센조. 카미노를 걷다가 만나 사랑에 빠져 5년 전에 결혼했단다. 그 말을 들은 내가 격분해서 외쳤다. “인생은 너무 불공평해! 나 카미노 여덟번째 걷고 있는데 왜 난 못 만나냐구요?” 아그네시카가 웃으며 말했다. “나 여덟번 걷고 난 다음에 남편을 만났어. 그러니까 너도 이번에 만날 거야.” 이제 운명의 짝을 만나는 건가. 그때부터 일행들은 혼자 걷는 남자만 보이면 나를 밀어댔다. 특히 산책단 막내는 매의 눈으로 순례자들을 살피다가 제 눈에 차는 남성이 보이면 은근히 나를 부르곤 했다.

우리는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걸었다. 비가 내리면 담담히 판초를 꺼내 입었다. 길을 걷다 보면 담장 위에 순례자를 위해 오렌지를 내놓은 집들이 있었다. 달고 신선한 오렌지를 자주 간식으로 먹으며 걸었다. 내륙길은 대부분이 평지여서 걷기에 수월했다. 일정도 240㎞를 12일 동안 걷도록 짜서 느슨했다. 다들 물집으로 고생하면서도 잘 걸었다. 방과후 산책단에 온 분들은 대부분 50대여서 체력이 아주 좋은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출발 두달 전부터 매주 미션을 줬다. 1만보에서 시작해 마지막에는 2만5천보를 짐 메고 걷는 것까지. 한주에 세번을 걷고 단톡방에 인증샷을 올리게 했다. 모두가 놀라울 정도로 성실하게 미션을 수행했다. 민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도 한몫했을 것이다. 사전에 미팅을 하고, 단톡방에서 매주 인증샷을 올리며 만난 덕분인지, 일행들은 금세 가까워졌다. 훈훈하던 분위기가 처음 반전된 건 걷기 시작한 지 사흘째, 폰트드리마에서였다. ‘눈물의 볶음밥 사건’이 나를 강타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여행기를 두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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