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비룟값 순식간에 5배 급등, 가뭄보다 더 무서운 인플레"..신음하는 美 농민들

시카고=전준범 기자 2022. 5. 2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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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사이 2~5배 급등한 비료·제초제 가격
생산 비용 상승에 고심 커지는 미국 농부들
소비자물가 자극하는 생산자 측 물가 상승
고물가에 식어가는 엔데믹發 보복소비 열기
5월 25일(현지시각) 미국 일리노이주 북동부 그런디 카운티의 메이존에 있는 농경지에서 한 농민이 트랙터를 활용해 대두를 파종하고 있다. / 전준범 기자
작년 이맘때 질소비료 가격이 기준단위당 165달러 정도였죠. 지금 사려면 800달러는 줘야 해요.

지난 5월 25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일리노이주(州) 북동부 그런디 카운티의 시골 마을 메이존. 광활한 평야에 펼쳐진 옥수수·대두 농장에서 만난 폴(Paul)과 도나(Donna) 부부는 최근 미국 경제의 암초로 떠오른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에 관해 묻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남편 폴은 “비교적 저렴할 때 사둔 (비료) 재고분이 남아 아직은 괜찮지만, 앞으로가 문제”라고 했다.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50년 가까이 옥수수와 대두 농사를 지은 폴 씨가 최근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그에 따른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전준범 기자

노부부를 고민에 빠뜨린 건 1년 만에 5배가량 뛴 질소비료 가격뿐만이 아니다. 작년 겨울 톤(t)당 400달러에 구매하던 인산비료는 현재 1000달러까지 치솟았고, 300달러 안팎이던 칼륨비료는 700달러 가까이 급등했다. 지난해 갤런당 16달러 수준에서 사오던 제초제는 60달러를 돌파한 지 오래다. 대형 농기계 작동에 필요한 액화석유가스(LPG) 가격 역시 2배 이상 올랐다는 게 부부의 설명이다.

폴과 도나는 1975년부터 50년 가까이 농사를 지었다. 지난해 옥수수를 심은 땅에 올해 대두를 심는 식으로 두 작물을 번갈아 키운다. 농경지 규모는 4800에이커(약 19.42)다. 농사 베테랑인 이들에게도 살인적인 물가 상승세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도나는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면 오랜 기간 써온 비료·제초제를 보다 저렴한 제품으로 교체할 수밖에 없다”며 “농작물 품질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했다.

폴 씨가 자신의 곡물 저장소에서 생산 비용이 상승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전준범 기자

◇ “기후 변화보다 8%대 고물가 충격이 더 커”

폴과 도나 부부가 맞닥뜨린 고(高)물가 위기는 미국 농업계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이슈다.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심화한 글로벌 공급망 차질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등은 에너지·원자재 가격을 솟구치게 했다. 여기에 러시아가 세계 최대 비료 생산국이라는 사실은 농민들을 더 힘들게 한다. 러시아는 전 세계 요소와 질산암모늄 수출을 각각 11%, 48% 담당해왔다. 글로벌 칼륨 수출의 40%를 책임져온 나라도 러시아와 동맹국인 벨라루스다.

복합적인 악재는 미국을 최악의 인플레이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올해 3월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8.5%로, 1981년 12월 이후 4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4월 상승률도 8.3%로 2개월 연속 8%대를 이어갔다. 생산자물가 상승률도 3월과 4월에 각각 11.5%, 11.0%로 높은 수준을 지속했다. 이달 4일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고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0%포인트(p) 인상하는 ‘빅스텝’을 단행했다. 연준 내부에선 6과 7월에도 빅스텝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폴은 토네이도·가뭄과 같은 기후 변화보다 생산 비용을 말도 안 되게 끌어 올리는 인플레이션이 더 두려운 존재라고 했다. 그는 “기후 변화도 심각한 문제지만, 종자 기술의 발전과 각종 농기계의 첨단화 덕분에 예기치 못한 기후 변화에 대응할 힘을 길렀다”며 “반면 비용 급등은 당장 생계와 직결된다”고 했다. 폴은 “시장 상황을 주시하면서 저장고에 쌓인 곡물의 출고 속도를 조절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사람들이 시카고의 유명 피자 가게 ‘우노’에 입장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 전준범 기자

◇ “불필요한 쇼핑 줄여”…소비 심리도 위축

폴과 도나 부부 같은 생산자를 괴롭히는 고물가는 결국 소비자가 느끼는 생활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구매력 하락과 경기 침체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런 시그널은 노부부를 만나기 전날(24일) 찾은 일리노이주 최대 도시 시카고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북아메리카 5대호 가운데 3번째로 큰 미시간호(湖)를 낀 대도시 시카고는 고층 빌딩과 현지인, 이 도시를 만끽하려는 관광객으로 붐볐다. 표면적으로는 코로나19 기간 억눌렸던 소비 욕구가 엔데믹(풍토병화)과 함께 분출되는 듯했다.

24일 저녁에 방문한 시카고의 유명 피자 가게 ‘우노(UNO)’는 시카고 명물 메뉴를 맛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엔데믹 상황을 즐기듯 식당 직원을 비롯한 현지인 대부분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상태였다. 관광객 중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한 이는 일부에 불과했다. 작은 식당 안에서 마음껏 웃고 떠드는 사람들 모습이 팬데믹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이곳에서 만난 시카고 주민 콜린 씨는 “사랑하는 친구와 밥 먹고 대화하는 일상을 되찾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했다.

시민과 관광객들이 미국 시카고 중심가를 걷고 있다. / 전준범 기자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41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그에 따른 경기 위축 가능성을 호소했다. 시카고 쇼핑가 미시간애비뉴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한 중년 남성은 “코로나19 확산세가 누그러지고 소비 심리가 살아났다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 후폭풍에 관한 경계심도 커졌다”라며 “판매자 입장에서는 각종 제품을 들여오는 단가가 오르고 있어 이익 감소에 대한 위기감이 크다”고 했다.

소비자도 두려움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일단 시카고 중심가의 식당과 상점이 모두 우노처럼 장사진을 이루는 건 아니었다. 현지에서 만난 대학생 카일 씨는 “관광객은 큰 지출을 각오하고 오기 때문에 그들의 소비가 전체 분위기를 대변한다고 보지 않는다”며 “이곳의 많은 거주자가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생필품을 사더라도 가급적 저렴한 걸 구매하려고 애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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