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에너지·지역패권 욕심에.. '러 전쟁 범죄' 눈감는 나라들 [심층기획]
美·유럽, 강력한 대러 제재 움직임에도
中이어 사우디·이스라엘 등 동참 안 해
쿼드 참여국 印은 러 원유 수입 더 늘려
보편적 인권보다 자신들의 이익만 따져
EU 회원국서도 제재 놓고 균열 일어나
"전력소비 느는 여름 이탈국 크게 늘 것"
친러 매체는 피해자 마녀사냥에 혈안
글로벌 SNS서는 가짜뉴스 더 잘 팔려
우크라이나 사태가 일어난 지 100일이 돼 가는 가운데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행한 끔찍한 전쟁 범죄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이에 눈감는 나라들이 많고 이를 왜곡하는 세력도 적지 않다.
친러 매체들이나 일부 학자들은 부차와 마리우폴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성폭력 등 인권 유린 사례들을 서구 언론의 허위·왜곡 보도라고 치부하고 있고, 국제사회의 절반가량은 대놓고 러시아를 두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러시아를 향한 제재에 동참하지도 않고 있다.
◆ 전쟁 범죄 왜곡하는 친러 매체, 글로벌 SNS도 가짜뉴스 방치
또 러시아 측은 “공격당한 병원은 이제는 운영되지 않는 마리우폴 제1 병원”이라고 강조했지만 실제 공습은 마리우폴 3번 병원에 이뤄졌으며 세계보건기구(WHO), 유엔인권고등판무관(OHCHR)에 의해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됐다.
그런데도 러시아의 주장은 사실 여부도 가리지 않은 채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영국 런던 전략대화연구소(ISD)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페이스북에서 지난 4월 둘째 주 기준, 부차학살이 우크라이나군에 의한 것이라는 등의 러시아 측 입장을 담은 게시물은 그렇지 않은 게시물보다 평균적으로 3배 이상 많이 공유됐다. 특히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유럽연합(EU) 국가에서 러시아의 민간인 학살 증거를 조작으로 의심하는 게시물이 많이 발견됐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국제사회로부터 철저히 고립시키려고 했던 미국의 의도와 달리 세계는 대러 제재에 참여하는 국가와 그러지 않은 국가로 양분된 상태다.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 고위인사 자산을 동결하고 러시아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제외하는 등 대러 제재를 이어 가고 있다. 이에 더해 서방을 중심으로 러시아 에너지 수입 중단을 시작했거나 논의 중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건재하다.
미국의 러시아를 돕지 말라는 경고에 대놓고 러시아를 두둔하는 국가는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제재에는 미온적인 나라들이 많다.
애초에 러시아와 가까운 중국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친미 국가로 분류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도 제재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강성용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남아시아센터장은 “인도는 현 상황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내세우며 인권이나 국제적인 규범보다는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실용적인 노선을 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 센터장은 “특히 인도는 자국 이익에 따라 인권이나 도덕에 눈감은 미국이 이제 와서 인권을 외치는 것을 우습게 여긴다”면서 “인도의 관심사는 남아시아에서 패권국가로서 입지를 다지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대러 제재에서 이탈하는 나라들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는 러시아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유럽조차도 유가가 폭등하는 상황에서 러시아산 원유, 천연가스를 계속해서 외면하기는 어렵단 관측이 나온다. 최근 EU 회원국들은 향후 6개월간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금수조치를 논의했지만, 러시아 석유 의존도가 높은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등의 반대로 합의에는 실패했다.
박정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신북방경제실장은 “러시아는 제재가 시작됐을 때와 달리 금융시장과 환율이 전쟁 이전보다 안정화되고 있다”며 “유럽의 주요 에너지 회사 10곳은 국제 결제망에서 제외된 러시아를 위해 에너지 대금을 루블화(러시아 화폐)로 지불할 수 있게 특별계좌를 만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 에너지는 단기간 대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력 소비가 큰 여름이 되면 유럽에서도 제재에서 이탈하는 국가, 회사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는 국제사회가 단결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27일 정재원(사진) 국민대 유라시아학과 교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전쟁 범죄를 막기 어려운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유럽과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 국가들은 보편적인 인권보다는 에너지나 지역 안보 등 정치·경제적인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다는 게 정 교수의 정세 해석이다.
정 교수는 이를 ‘전쟁 범죄의 관망자’라고 표현했다. 친러 국가들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국민연합(RN) 등 유럽의 극우 정당들도 러시아 편에 서고 있으며, 일부 좌파 학자들도 러시아를 비난하기보다는 미국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 정책 등에 더 책임을 묻는 등 러시아의 입장을 두둔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본질을 ‘러시아의 침략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국제 질서를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에서 지역 패권국들을 중심으로 한 다극 체제로 바꾸려는 것이 푸틴의 속내라는 게 정 교수의 판단이다.
그는 민간인 학살 등 러시아군의 잔혹 행위들이 러시아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일부 언론이나 학자들까지 이런 참상에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경우가 많다고 정 교수는 말했다. 정 교수는 “러시아는 민간인 공격이 없었으며 오로지 군사시설만 파괴하고 있다고 호도하고 언론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반대 목소리를 누르고 있다”며 “유럽 내 극우세력들이나 일부 좌파 서양 학자들도 러시아 언론 보도를 인용하며 러시아의 잘못을 감추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정 교수는 “그동안 미국이 세계에서 일으킨 문제가 있겠지만, 이로 인해 러시아의 침략을 정당화할 수 없다”며 “정치적 노선을 떠나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인권 보호, 평화를 외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구현모 기자 li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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