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얼굴 빼닮은 듯한 풍경.. 사랑의 감정, 캔버스로 기억하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2022. 5. 28. 18: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84) 기억에 반응하기
김은정 작가의 '녹지 않는 사람'
희미한 기억을 흐린 얼굴로 묘사
현실 참조한 가상의 풍경 표현해
직접적·감각적인 색 활용도 눈길
인간 감정의 환영 그려낸 김규원
'건물'서 누워서 잠든 모습 형상화
'초록 천막'선 사람 눈·코·입 투영
초현실적 장면 속 '온기' 전해져
김규원, ‘초록천막’(2020). 작가 제공
기억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장소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은 어떻게 남겨야 하는 것일까? 애써 좋은 순간만 떠올리며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 그냥 모든 순간을 두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고민해보지만 답을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한 고민을 한참 이어가다 깨닫는 것은 기억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상을 보내다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에 울거나 웃거나 하는 반응이다. 김은정(1986)과 김규원(1991)의 그림 속에는 기억을 움직이고 보는 이를 반응하게 하는 얼굴과 몸이 있다.

#김은정, 녹지 않는 사람

김은정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판화와 시각디자인 복수전공으로 졸업했다. 이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대학원 조형예술과를 졸업했다. 학고재, 에이라운지, 가변크기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의외의 조합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신진 작가이지만 2021년 개인전 ‘가장 희미한 해’는 국제적인 관심을 모았다. 아트 바젤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이 ‘이번 주 놓치지 말아야 할 5개의 전시’로 소개해 화제가 됐다. 2016년부터 디자인 스튜디오 겸 출판사인 ‘찬다 프레스’를 운영하고 있다.

김은정은 현실을 참조한 가상의 풍경을 그린다. 그가 참조하는 현실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들이다. 정서적 경험부터 타인과의 관계, 목격한 장면, 책 속의 서사까지 모두 현실의 부분이 돼 그림에 나타난다. ‘식물수업’(2021)처럼 식물 수업이 열린 숲의 풍경을 떠올리며 그리지만 낮이었던 시간 배경은 밤으로 탈바꿈하는 식이다. ‘붉고 큰 것’(2021)에서는 숲속에서 피운 모닥불이 한 책 속에 묘사된 축제의 현장으로 옮겨가 붙는다. 소재의 범주가 넓은 만큼 흥미로운 장면들이 화면 위에 등장하고 그것들은 저마다의 서사를 드러낸다.
김은정, ‘녹지 않는 사람’(2021). 학고재 제공
‘녹지 않는 사람’(2021)은 ‘가장 희미한 해’에서 선보였던 작품이다. 김은정은 윤원화가 쓴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을 읽다가 ‘가장 희미한 해’라는 말을 봤다. 책의 소제목 중 하나인 그 말 아래엔 “지나간 시간의 기억은 일종의 꿈 또는 유령 같다”는 문장이 있었다. 문장을 읽고 나니 어쩐지 태양이 떠올랐고 태양이 지닌 모순된 성격을 생각했다. 태양은 눈앞을 밝혀주지만 가장 강렬한 태양은 오히려 눈을 멀게 한다. 모네가 시력을 잃은 것도 해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부단히도 보고 그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순적인 ‘가장’과 ‘희미한’은 하나로 합쳐졌고 ‘녹지 않는 사람’도 그려졌다.

여기에는 한 여자의 얼굴이 있다. 단발머리에 핑크색 셔츠를 입은 여자. 회상하듯 시선을 잃은 얼굴은 입을 꼭 다문 채 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얼굴에 닿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은 파란색이다. 얼음 같은 얼굴은 녹을 법도 하지만 녹지 않고 그대로다. 오히려 녹고 있는 듯한 것은 그를 보는 상대다. 노란빛의 얼굴은 같은 색의 배경 속으로 사라진다. 가장 강렬했던 사람이 흐려지고 결국 남는 것은 녹지 않는 사람이다.

이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김은정의 남다른 색 활용이다. 직접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작가의 색 사용은 보는 이를 상상하게 한다. 그가 공통 경험 속 개별 사건에 집중하고 모아 만들어낸 비현실적 장면과 마찬가지다. 파란색 얼굴은 실재할 수 없는 모습이기에 현실이 아닌 곳으로 보는 이를 옮긴다. 그렇게 보는 이가 발붙인 곳은 ‘일종의 꿈 또는 유령’이다. 바로 문득 떠올라 당신을 반응하게 만드는 잔상이다.
#김규원, 흘러내리는 기억

김규원은 서울여자대학교 현대미술과를 졸업했다.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석사 졸업 및 동 대학원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갤러리 한옥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은평 문화예술회관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8년에는 한국영상학회 영상 공모전에서 입상한 바 있다.

김규원은 인간 감정의 환영을 그린다. 그의 그림 속에서 인간의 감정은 환영이 돼 건물 등으로 나타난다. 불안, 고독 등 드러나지 않지만 소멸하지도 않는 감정은 이를 통해 표출될 기회를 가진다. 극복되고 해소되며 그 이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작업 세계를 두고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다음같이 설명한 바 있다.
김규원, ‘건물’(2020). 작가 제공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도시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동네의 건물들이 지어지고 철거되기를 반복하는 모습이다. 그러한 도시의 모습에서 어떤 동질감을 갖는다. 인간이 끝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소멸되는 과정에서,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과 재생되는 기억의 장면을 재개발하는 도시의 모습으로 은유해 표현하고자 했다. 연작 제목인 ‘가만한 나날’의 의미는 ‘가만하다’가 지닌 사전적 뜻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데 있다. 개인의 감정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거대한 도시가 세워지고 일상은 흘러가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간다. 문득 솟구치는 감정이 비현실적인 거대한 환영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신체 일부가 되거나 그리운 장소로의 연결이 된다.”

‘건물’(2020)은 ‘가만한 나날’ 연작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는 화면 가운데 텅 빈 건물이 놓여 있다. 철거를 앞둔 건물 외벽을 비계가 둘러싸고 있다. 먼지를 막기 위해 비계에 쳐 두었던 천막이 태풍을 앞두고 머리 땋듯 묶였다. 걷어 둔 천막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침대 밑으로 축 처진 이불 같다. 그렇게 천막은 방으로 들어오고 산처럼 보이는 건물 뒷배경으로 이어진다. 이불을 덮고 잠든 사랑하는 사람이 옆으로 누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건물’에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 있다면 ‘초록천막’(2020)에서는 얼굴이 보인다. 거대한 유리창을 가진 건물 앞에 오래된 낡은 건물. 그 건물 위 녹슨 안테나와 거기에 연결된 전선이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옥상에는 천이 바람에 나부낀다. 아래위로 들썩이는 초록 천막은 파도가 물결치듯 고저(高低)를 만들어 낸다. 그 고저가 형성하는 것은 이마, 눈, 코, 입술 순으로 자리 잡은 얼굴이다. 그리운 사람의 얼굴은 펄럭이는 천막이 돼 아득하게 보일 듯 말 듯 화면 가운데서 나타난다.

두 작품 모두 건물과 인간 신체 일부가 연결된 초현실적인 장면을 보이는 것이 매력이다. 다만, ‘초현실’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떠올리는 달리(Salvador Dali) 등의 그림 속 기묘한 장면과는 다른 분위기가 김규원의 그림에 있다. 온기가 전해지는 그의 화면 안에는 엄마 또는 사랑하는 사람 품에 안겨 꿨던 안온한 꿈의 공기가 전해진다. 캔버스를 이어 붙이거나 시점을 연결하는 작가의 작업 방식은 그림 안 공간이 연결되도록 만든다. 이를 통해 그림을 마주했을 때 관객은 환영적 공간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경험한다. 전반적으로 흰색을 섞은 색채 사용 역시 환영이 현실 공간에 묻듯 그리기 위해서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