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M] 현관의 낯선 '회색 운동화'..20일치 CCTV 돌려봤더니

김민형 입력 2022. 5. 28. 11:31 수정 2022. 5. 2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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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 낯선 회색 운동화 한 켤레‥사건의 재구성

사건은 지난달 26일 낮 1시쯤 발생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딸을 학원을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온 박정현 씨(가명)는 현관에 낯선 회색 운동화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안방에서 거실 쪽으로 휙 지나가는 누군가를 보고, 잠깐 아이 아빠가 급한 일이 있어 들어왔나 싶은 생각도 스쳤습니다.

그러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베란다 문을 3분의 1쯤 열고 엉거주춤 서 있었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이 남자는 박 씨와 눈이 마주치자 연신 "죄송하다"며 황급히 달아나려 했습니다.

남자가 서 있던 자리엔 안방 서랍장에 있어야 할 속옷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린 박 씨가 달아나는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려 하자, 갑자기 남자는 현관문 앞에서 휴대전화를 빼앗으려고 해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불과 5분 남짓 동안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경찰 신고했지만 '감감무소식'‥누군가 명함을 남겼다

박 씨는 경찰에 곧장 신고했지만, 피해자가 범인을 잡았느냐고 물어볼 때까지 열흘 넘도록 들리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경찰은 사건 12일째인 5월 7일에야 다녀간 남성이 누군지 특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남성이 부모와 함께 살아 주거지가 일정하고, 범행을 시인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며 긴급체포하지 않았습니다.

남성이 임의동행을 거부해 조사도 곧바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체포도 조사도 지연되는 사이, 박 씨의 아파트를 누군가 찾아왔습니다.

남성 측이 선임한 변호인이 아파트 경비실을 찾아와 '사죄한다'는 취지로 명함을 남기고 간 겁니다.

딸 둘을 키우는 피해자 부부는 사건 이후 집에 누가 들어올 때마다 휴대전화로 알림이 울리는 '스마트 현관 잠금장치'와 집 내부 CCTV도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남성이 체포되거나 구속되지 않은 만큼 언제든 집을 찾아올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가 어디서부터 따라왔는지, 어떻게 집을 알고 문을 열고 들어온 건지, 이 근방 아무 집이나 무작위로 침입한 건지, 어떤 목적이 있었던 건지, 경찰은 누군지 알면서도 왜 붙잡지도 조사하지도 않는 건지, 불안하고 답답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대체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돌이켜 보면 이번 시도가 처음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피해자 박 씨는 말했습니다.

박 씨가 처음 기억하는 '침입 시도'는 사건 1~2주 전 낮 시간대에 벌어졌습니다.

혼자 집에 있는데, 누군가 비밀번호를 천천히 한 자리씩 눌렀던 겁니다.

'누구세요' 묻는 박 씨의 목소리에 인기척은 사라졌습니다.

문을 열고 나갔지만 바깥에 아무도 없어, 다른 집 아이들이 실수로 잘못 눌렀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돌이켜 보니 섬뜩한 일이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왔을까? 현관문 잠금장치 업체는 강제 침입의 흔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아파트라서 외벽을 타고 창문으로 침입하기는 어려워 보였고, 비밀번호 자릿수도 길어 조합을 틀리지 않고 한번에 맞춘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결국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 나는 소리를 토대로 번호를 조합했거나, 근처에서 박 씨 가족이 비밀번호 누르는 걸 지켜보며 번호를 파악했을 가능성이 제기됐습니다.

아파트 계단에는 CCTV가 없는 점을 악용해, 계단을 계속 오르내리면서 주변을 오갔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박 씨는 문제의 '회색 운동화'와, 모자와 마스크로 가린 틈새로 보였던 남성의 눈매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취재진은 그 인상착의를 토대로 아파트 측의 협조를 받아 사건 전후의 CCTV를 전부 분석해보기로 했습니다.

내 집처럼 드나든 '회색 운동화'‥손 소독제는 꼭 발라

사건이 일어난 날 CCTV에서 가장 눈에 띈 점은 이 남성이 '후다닥'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집 주인에게 걸려 몸싸움을 벌이다 계단으로 도망쳐 나온 상황인데도, 남성은 마치 아파트 주민처럼 1층 공동현관을 여유롭게 걸어서 나갔습니다.

공동현관을 나온 뒤에야, 조깅하듯 천천히 달려 단지를 벗어난 수준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아파트 단지 계단에 운동하러 다녔다'는 취지로 진술했습니다.

현장에서 다른 주민이 봤더라도, 주거침입을 하고 도망치는 사람이라기보다 평범하게 조깅하는 청년으로 넘겼을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확인 결과 이 남성은 사건 전날인 25일에도 아파트를 찾아온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옷은 달랐지만, 회색 운동화 만은 같았고 무엇보다 행동 양태가 동일했습니다.

남성은 두 번 모두 아침 '정시'에 출석 도장을 찍듯 계단을 올랐습니다.

9시 23분이나 4시 17분 같은 어중간한 시각이 아니었습니다.

회색 운동화'가 아파트 1층 바깥으로 나가는 모녀를 확인하듯 뒷편을 서성거리다, 다시 계단으로 향하는 모습도 찍혔습니다.

이 남성은 그 날 하루 동안 피해자 가족이 사는 층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가면서 아파트에 6시간 이상 머물렀습니다.

사건 당일과 전날, 두 번 모두 두리번거림이나 망설임없이 곧장 계단을 올랐습니다.

계단으로 오르내릴 땐 반드시, 마치 의식이라도 치르듯 손소독제를 발랐습니다.

한두 번만 드나들었다고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습니다.

사건 당일 포함 최소 4차례 방문‥일요일 한낮 2주 연속 침입

사건 당일인 26일과 전날인 25일에 이어, 그 전날인 24일 CCTV에도 '회색 운동화'는 여지없이 잡혔습니다.

24일(일요일) 아침 10시경 남성은 파란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범행 당일 입었던 파란 긴팔 옷에 검은 반바지 차림으로, 똑같은 회색 운동화를 신고 계단을 올랐습니다.

3시간 뒤, 놀러나간 피해자의 딸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쪽으로 내리는 순간 비상계단 쪽에서 회색 운동화가 후다닥 사라지는 모습이 희미하게 잡혔습니다.

1분 뒤, 1층 계단으로 태연하게 내려온 남성은 어김없이 손소독제를 바르고 아파트를 떠났습니다.

CCTV를 돌려 본 지 6시간쯤 지났을까. 눈이 뻐근해질 때쯤 17일 '일요일' CCTV에서 또 그 남성이 보였습니다.

이 날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피해자 집과 가까운 층에 내렸고,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팔꿈치로 버튼을 눌렀습니다.

이렇게 사건 당일을 포함해 최소 4차례 찾아온 남성이, '동일 인물'인 것으로 판단해도 될까?

앞서 경찰은 MBC의 첫 보도 때 사건 전날 CCTV에 찍힌 남성에 대해 "동일범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며 신중한 반응이었습니다.

취재진은 MBC 영상편집실에서 이틀치 CCTV화면을 분할해 양 옆에 두고 대조해봤습니다.

"화면을 분할해서 보면, 걸음걸이나, 발걸음 옮길 때 몸이 흔들리는 폭이 똑같아요."

정말 옷차림은 달랐지만, 화면을 대조해놓고 재생하자 걸음걸이와 보폭이 짜 맞춘 것처럼 똑같이 동시에 움직였습니다.

계단을 타고 1층까지 내려오는데 1분밖에 안 걸리는지 재 봤더니, 피해자 집보다 한 칸 윗층에서 가방을 매고 천천히 걸어서 내려와도 정확히 1분 15초밖에 안 걸렸습니다.

피해자 부부는 "원래 주말에 여행을 가 집을 비울 때가 있는데, 남성이 딸과 마주친 24일은 집을 비우지 않았다"며 "남성이 언제 사람이 들고 나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고 의심했습니다.

남성 측 변호인은 MBC와의 통화에서 "피해자 쪽 주장도 있겠지만, 조사 중인 사안이라 따로 드릴 말씀은 없다"고 답변을 유보했습니다.

보도 후 결국 구속된 남성..경찰 첫 판단 문제 있었나?

당초 긴급체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경기 분당경찰서는 "CCTV 동선을 추적해 이 남성의 신원을 특정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뒀고, 이후 사건 이전 CCTV를 토대로 여죄를 수사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경찰은 이후 조사 과정에서 남성이 아파트를 그 전에도 세 차례 방문한 사실을 확인했고, MBC 보도 후 영장을 신청해 25일 이 남성을 구속했습니다.

긴급체포는 중대한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이 증거를 없애거나 도주할 우려가 있고, 긴급한 상황이라 체포영장을 발부받을 시간 여유가 없을 때 먼저 체포하는 제도입니다.

영장을 청구하려면 긴급체포 후 48시간 이내에 이뤄져야 합니다.

한 변호사는 "원칙적으로 임의수사가 가능하면 긴급체포는 하지 않는다"며 "48시간 안에 모든 증거를 찾아 체포영장을 발부받기엔 시간이 빠듯한 면도 있고, 체포권 남용이라는 비판도 고려했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다만 "속옷이 떨어져있었던 점 등을 감안해 단순 주거침입이 아니라 성폭력을 목적으로 주거침입을 한 혐의가 있다고 본다면, 수사기관이 더 사안이 무겁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지난 2016년, 서울 강남에서 60대 남성이 일면식 없는 여성의 집 비밀번호를 알아내 집에 들어간 뒤 더 큰 강력범죄를 벌인 사건이 있었던 만큼, 주거침입 문제를 가볍게 판단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경찰 조사에서 남성은 '안방 서랍장이 열려 있어 꺼냈을 뿐, 속옷인 줄은 몰랐다'고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경찰은 휴대전화 임의제출 방법을 검토하는 등 수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피해자 부부는 "절차에 의해 체포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또다른 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경찰의 경각심이 필요했다"며 "이제라도 구속돼 다행이고 조사가 잘 이뤄지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보도 후 피해자 가족에 대해 뒤늦게 신변보호(범죄피해자보호조치)가 이뤄졌고, 피해자가 경찰에 요청해 불법촬영 장비가 설치됐는지 검사도 이뤄졌습니다.

이 사건이 검찰에 넘겨진 뒤 재판 과정도 계속 취재하겠습니다.

취재 : 김민형 / 영상취재 : 현기택 / 영상편집 : 조민우·권나연

[연관기사]①[제보는MBC] 대낮 집 안 거실에 낯선 남자가‥이전에도 반복 출몰?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desk/article/6369997_35744.html ②[단독] '거실의 침입자', 범행 전 최소 3차례 아파트 방문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desk/article/6370710_35744.html

(김민형)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newszoomin/newsinsight/6373255_291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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