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푸틴 혼쭐내면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깃들까?
[임경구 기자(hilltop@pressian.com)]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한 지 3개월이 지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맞은 최대의 군사적 위기를 넘어 이제 전 세계 안보와 경제 질서의 명운이 걸린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서방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도박판으로 삼고, 지구 전체 운명을 판돈 삼아 배팅 중이다.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제제재 수위는 최대치를 향해간다. 이에 맞서 러시아는 핵전력 경계 태세를 높여 놨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몰라도, 강대국들이 부딪힌 파열음의 결말은 대체로 비극적이다. '신냉전'을 넘어 '핵전쟁', '3차 세계대전' 우려가 쏟아진다.
강대국들이 앞 다퉈 일으킨 이 상승의 소용돌이는 전 세계 약한 사람들을 구조적 희생자로 등 떠민다. 치솟는 유가와 식료품 가격은 우크라이나로부터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까지 영향을 미친다. 빈국일수록, 가난한 사람일수록 치명적이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은 러시아와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간 제국주의 경쟁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상황은 러시아의 군홧발에 용감한 우크라이나가 짓밟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국주의 간 갈등입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독립 이후 인민의 기대를 등진 수많은 정부들의 최신 사례에 불과하며 이 갈등에서 졸개 구실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알렉스 캘리니코스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유럽학 교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인 캘리니코스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제국주의 나라들이 벌이는 패권 충돌로 접근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각축전>(알렉스 캘리니코스·로잘리·김준효·이원웅·클레어 렘리치·김영익, 책갈피).
소련 몰락 이후 위축된 세력권 재건을 모색하는 러시아, 중국‧러시아 봉쇄에 돌입한 미국, 이들과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는 중국이 우크라이나를 전장으로 벌이는 자본주의 세계질서 재편 갈등이며, 전 세계 빈국과 약자들에게 막대한 피해가 집중되기에 '계급전쟁'이 본질이라는 시각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국제 밀 수출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중동, 북아프리카, 아시아 국가들이 심대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곡물로 만든 끼니 말고는 먹는 게 거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분명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것이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을 가치로 '푸틴 퇴마' 대열에 집결했다. 우크라이나 전황, 민간인들의 희생과 피란 행렬 소식을 실시간으로 쏟아내는 '가치동맹' 나라들의 표적은 전쟁범죄를 저지른 러시아와 '현대판 히틀러' 푸틴을 조준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 사람이 더는 권력을 유지해선 안 된다"고 '푸틴 축출'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 프레임에서, 러시아는 보편적 가치 수호를 위해 마땅히 고립돼야 할 악당이다.
캘리니코스를 비롯해 사회주의계열 활동가인 저자들은 푸틴이 이끄는 러시아의 본성이 소련 몰락 이후 서방 주도의 정치‧경제 질서 내에서 성장한 호전적 제국주의라는 의견에 일치한다. 그러나 러시아로부터 우크라이나를 지키자는 숭고한 가치동맹이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는 믿음 역시 순진한 환상으로 본다.
'주류 미디어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우크라이나와 그 서방 후원국들이 대표하는 '민주주의' 대 러시아의 푸틴 정권으로 표현되는 '권위주의' 간의 쟁투로 묘사한다. 그렇지만 이는 지나친 단순화다. (…) 러시아는 분명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행동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두들겨 굴복시키고 우크라이나 영토를 자기에게 유기하게 분할하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 전쟁을 이렇게만 이해해도 될까?'(캘리니코스, 199~200쪽)
'푸틴 악마화'에 머문 접근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교란하고 실질적인 평화를 방해하기도 한다. 저자들은 우크라이나 침공의 동전의 뒷면 격인 미국의 대서양 군사동맹, 즉 '나토의 동진(東進)' 정책에 주목한다.
냉전 이후 30년 간 진행되고 있는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 세력권인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편입 시, 나토군은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를 700km 사거리에 둘 수 있다. 단거리탄도미사일 사정권이다.
'1990년 당시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통일 독일의 나토 가입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미국에게서 나토를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클린턴 정부는 이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었다. 소련 해체로 러시아가 종이호랑이가 된 틈을 타 미국은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공세적 동진을 했다. (…) 나토의 공세적 동진은 서유럽 부국들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졌다. 이들은 동구권에서 값싼 노동력과 수출 시장을 얻어내려고 미국에 적극 협조했다.'(145쪽)
나토의 동진을 문제제기하면 서방은 "나토 가입을 신청한 핀란드와 스웨덴을 보라"고 의기양양하게 꾸짖는다. 주권국가는 자국영토 방위를 위해 동맹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캘리니코스는 "특정한 군사동맹에 참여할 천부적 권리 같은 것은 없으며, 나토 가입은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독립한 이래 늘 여론이 첨예하게 갈리는 쟁점이었다"고 반박한다.
나아가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2000년대 이후 중동 전쟁에서 실추된 위상을 만회하고 국제질서에 새판짜기를 도모하고 있다. '냉전의 패배자' 러시아와 '중동의 패배자' 미국이 절치부심할수록 더욱 위험해지는 조합이라는 게 저자들의 시각이다.
현재 벌어지는 강대국들의 패권 갈등은 우크라이나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의 타깃은 러시아와 함께 주전장 중국을 포괄한다. 러시아를 위협한 나토 확장은 '쿼드(QUAD)' 강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출범으로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과 판박이다.
한국도 강대국들의 패권 전쟁으로 빨려들어가는 중이다. 문재인 정부가 미국이 주도한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에 동참했으며, 윤석열 정부 들어 전방위로 강화된 한미 동맹은 중국과 러시아를 자극할만한 위험한 시그널을 보냈다.
윤 대통령은 지난 주 바이든 대통령과 가진 한미 정상회담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공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두 분이 자유민주주의 이야기를 폭포수처럼 쏟아냈다"는 관계자의 전언도 있다.
양국 정상은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저해하고 불안정을 야기하거나 위협하는 모든 행위를 반대하며, 국제사회와 함께 단결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일방적인 추가적 공격을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보편적 가치로 포장해 외교적 균형을 섣불리 무너뜨린 선택은 제2, 제3의 위기를 불러낼 수 있다.
'점점 더 심각해지는 미‧중‧러 강대국들 간 갈등에 한국이 또 한발 더 깊숙이 관여하는 것은 아시아의 불안정 고조에 일조하는 것이다.'(310쪽)
[임경구 기자(hilltop@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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