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에 재개된 '한국 팝 고고학', 1990년대로 범위를 넓히다

2022. 5. 2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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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 팝의 고고학> 저자 신현준·최지선·김학선

[이대희 기자(eday@pressian.com)]
대중음악을 '알 만한 사람은 아는'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우리말로 쓴 책들이 있다. <한국 팝의 고고학> 시리즈가 그렇다. 1960년대 편과 1970년대 편 두 권으로 지난 2005년 나온 이 책은 이른바 '가요 팬'임을 자처하던 사람들도 모르던 우리 가요사를 넓고 깊이 추적하고 정리한 명저로 팬들 사이에 꼽혀왔다.

예컨대 일제가 유달리 라틴 음악에는 관대해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적성국 음악인 '쟈스(당시 재즈를 비롯한 서양 음악을 통칭하던 개념에 가까움)'를 금지하던 때도 라틴음악 명맥은 살아있었다는 이야기, 군부가 '퇴폐풍조'를 단속하던 시기 그룹사운드 폭발을 이끈 곳이 서울 회현동 '고고 크럽'인 '닐바나'였다는 사실 등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는 이들이 많았다. 책이 가진 독자성이 워낙 빛났던 탓에 절판 이후에는 중고 책 시장에도 책이 잘 풀리지 않았고, 가끔 온라인 중고서점에 책이 나올 때면 값이 서너 배로 뛰기 일쑤였다.

무려 17년 만에 전설적인 두 권의 개정판이 나왔다. 아울러 후속작인 1980년대 편과 1990년대 편이 함께 출간됐다. 이로써 '고고학'은 196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발굴의 범위를 넓혔다. 출판사가 한길사에서 을유문화사로 바뀌었고, 책 디자인이 변했고, 다루는 시기가 달라졌으나 내용의 충실함은 그대로다.

전작인 1960년대 편과 1970년대 편의 저자인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와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가 그대로 돌아왔고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가 새롭게 가세했다. 한국 대중음악 서술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필진이 '팝'이 한국에 정착해 '한국 팝'으로 탄생한 순간(1960년대 편)부터 '케이 팝'으로의 문을 여는 아이돌 시스템 시작의 순간(1990년대 편)까지를, '통키타 빅뱅'(1970년대 편)이 대학로 '언더그라운드'(1980년대 편)를 지나 홍대 앞 '인디'(1990년대 편)로 폭발하기까지의 여정을 안내한다. 고고 클럽의 열기(1970년대 편)와 댄스 팝 르네상스(1990년대 편)가 담은 당대 청춘의 에너지에도, 음악이 운동임을 웅변하던 민중가요 '전사'(1980년대 편)들의 세계와 약동하던 미8군 무대를 메우던 '모던한 혁명가'의 세계(1960년대 편)에도 저자들의 시선이 닿아 있다.

25일 <한국 팝의 고고학> 출간을 기념해 서울 서교동 을유문화사에서 세 명의 공저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신간인 1980년대 편과 1990년대 편에 관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두 권의 책 초고를 정리하는 데만 5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자료 준비에 걸린 시간, 수집한 자료의 양, 인터뷰한 인물들은 수치화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저자들의 뼈를 깎는 고통의 순간을 통해 독자들은 한국음악 통사(通史)를 긴 시선으로 읽어볼 수 있게 됐다.

▲(좌로부터 우로) <한국 팝의 고고학> 저자인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가 네 권으로 볼륨이 커진 책을 들었다. 25일 서울 서교동 을유문화사 인터뷰룸. ⓒ프레시안(이대희)

196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한국 팝' 이야기

책을 접하지 않은 독자라면 우선 드는 의문이 있다. 왜 가요가 아니라, 대중음악이 아니라 한국 팝인가. 1960년대 편의 개정판 후기에서 신현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자들이 창안한 '한국 팝'이란 대중가요 전체가 아니라 '팝'이 '한국'과 어떻게 조우하고, 갈등하고, 교차하고, 중첩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 K-pop 혹은 케이팝이라는 조어에서 보듯 팝은 더 이상 아메리카만을 표상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대중음악' 혹은 '가요'는 미국 대중음악(팝)이 한국화한 음악이다. 우리가 대중음악 장르를 나누는 기준이 록, 알앤비, 펑크, 테크노 등 미국의 장르 기준과 같은데서 이를 알 수 있다. 우리는 1990년대 활동한 남성 트리오 솔리드를 두고 '알앤비 그룹'이라고 칭하는데, 이때 '알앤비'는 미국 가수 보이즈투멘이 하는 음악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굳이 '고고학'인 이유는 또 뭘까. 신현준 교수는 이 책을 만드는 데 든 '노가다'의 중요성을 새삼 거론했다.

"1960년대 편, 1970년대 편 이후 1980년대 편, 1990년대 편이 나오기까지 17년이 걸린 이유와도 상통해요. 책 작업은 계속 했어요. 그런데 인터뷰하면서 새로 알게 되는 사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졌어요. 새로운 팩트를 찾아낸다고 해서 바로 글로 나오지 않아요. 관련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야죠. 이렇게 모은 디지털 자료만 외장 하드디스크 기준 1테라바이트 이상이에요. 있는 걸 찾아내는 발굴 작업이 있었으니 '고고학'이라고 이름 붙였죠. 
우리끼리 이런 이야기해요. 조동진 3집에서 4집 나오는 데 5년 걸렸고, 4집에서 5집 나오는 데 6년이 걸렸는데, 5집과 6집 사이 20년이나 걸린 이유를 이제야 이해하겠다고요. '이미 세상에 다 있는 자료를 모은 걸 갖고 생색내느냐'고 할 수도 있겠죠. 물론 가수 나미가 일본에서 발매한 음반, 일본 아마존에 들어가면 구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찾아내는 사람은 별로 없겠죠." (신현준)

"1960년대와 1970년대 작업을 위해 우리가 구한 모든 LP 음원을 나름대로 복각(?)하여 디지털화하고, 앨범 커버를 스캔하여 병합해 정리해두었어요. 초판 작업 당시는 지금처럼 포털사이트에서 옛날 신문들을 볼 수 없었기에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를 지인에게 빌리고, 찾아낸 자료를 일일이 도서관에 가서 복사했어요. 여기서는 언급할 수 없는 노동의 순간이 많았기에 이후 연대의 작업도 가능했어요. 이런 작업이 엄청나게 고되고,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렇지만 이제 고생담은 그만 말하자고 현준 선배가 압박하네요. (웃음)" (최지선)

세 사람의 필자가 책을 함께 썼다. 일손은 어떻게 나눴을까. 대중음악을 끼고 사는 사람들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각자가 개별 장을 분담해 초고를 써요. 음반 제작에 비유하자면 레코딩이죠. 이걸 다 모아서 형(신현준)이 살을 붙이고, 빼고, 어떤 문단은 앞으로, 어떤 문단은 뒤로 배치하죠. 일종의 믹싱(mixing)이에요. 그럼 그 정리본을 다시 저와 지선 누나가 다듬는 마스터링 과정을 거쳤죠." "초고를 쓸 때 각자 마감 시간을 어떻게 관리했나요?" "마감은 정했죠. 그런데 작업 해보니 현준 형과 제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힘들었어요. 제가 '오늘 밤에 마무리할게요' 하면 형은 '밤 몇 시까지 할 거냐'고 물어요. 저는 '밤에 한다'는 건 다음 날 아침에 드린다는 거거든요." (김학선)

개정된 60년대 편, 70년대 편

워낙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원고 작업이 이어졌다. 1980년대 편은 768쪽, 1990년대 편은 756쪽에 달할 정도로 두꺼운 책들이다. 1980년대 편의 경우, 처음 원고 작업은 2012년경 시작됐다. 그러나 이후 여러 문제로 인해 작업이 중단됐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편의 대부분 인물 인터뷰가 2013년을 전후해 집중된 배경이다.

다시 출판사와 연결돼 신현준 교수와 최지선 평론가가 1980년대 편 초고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는 2016년이다. 만 2년이 지난 2018년에 이르러서야 1980년대 편의 초고 탈고가 끝났다. 이때를 전후해 김학선 평론가가 합류해 1980년대 편의 마무리 작업이 들어갔다(1980년대 편 1쇄 저자에는 김학선 평론가 이름이 빠졌으나, 저자들은 김학선 평론가 역시 저자 명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곧 이어 1990년대 편의 초고 작업이 시작됐다. 1990년대 편의 원고 작업 시기는 2018년에서 2021년이다. 작년 겨울에 이르러서야 두 책의 교정 작업이 시작됐다.

긴 시간이 걸린 만큼 작업 환경이 달라졌다. 60년대 편, 70년대 편의 초판을 낼 때(2005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존재하던 신현준 교수의 작업실은 지역 젠트리피케이션에 따라 사라졌다. 그 사이 언론사들의 저작권 개념도 달라졌다. 의외의 복병이 됐다. 필진은 한 공중파 방송사가 유튜브에 올린 인순이의 무대 영상(인순이가 노래하고 김완선이 백업 댄서를 맡은 영상) 캡처본을 그림 자료로 이용하고자 저작권 관련 문의를 했다. 방송사는 이용료로 30만 원을 달라고 했다. 이를 "매년 갱신해야 한다"는 단서까지 붙였다. 도저히 응할 수 없는 요구였다. 초판 때는 문제가 없던 자료사진을 개정판에는 사용하지 못해 1960년대 편과 1970년대 편 일부 사진은 삭제해야만 했다. 이런 식으로 싣지 못한 그림 자료가 상당하다고 저자들은 아쉬워했다.

대신 새롭게 추가한 중요한 자료도 있다. 특히 저자들은 1960년대 편에 새롭게 수록된 데블스의 '해골 퍼포먼스' 사진 자료에 자부심을 가졌다. 1970년 7월 '제2회 플레이보이컵 보컬그룹 경연대회'가 열렸다. 요즘으로 따지면 뮤직 페스티벌 격이다. 히 식스가 최고상을 차지한 이 대회에서 '기지촌 소울' 음악을 하던 데블스는 해골 복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 여성의 시체(출연자가 시체역을 연기했다)가 들어있는 관을 놓고 곡 <Goodbye My Love>를 연출해 '구성상'을 차지했다. 초판에는 해당 사진 자료가 없지만, 개정판 작업 시 미국인 래리 트레슬러로부터 해당 사진 자료를 받았다. 이런 자료 하나하나가 모두 한국 대중음악사를 기억하는 데 더없이 중요하지만, 그간 성장에만 바빴던 우리 사회가 이처럼 중요한 대중문화 미시사를 놓쳐왔다. 

개정 작업을 통해 1960년대 편 초판에는 실리지 않았던 고 손석우 선생과 조용호 전 TBC(후일 KBS2) PD, 이장희 선생의 인터뷰를 보강한 것도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2019년 별세한 손석우 선생은 '팝 계열 가요'를 개척한 작곡가이자 작사가다. 영화 <청실홍실>의 음악을 감독했고, 무엇보다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조용필의 <가랑비>, 문희옥의 <찬바람> 등을 만들기도 했다. 조용호 선생은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그룹사운드 '생음악 살롱의 메카'이자 '젊은이의 성지'였던 오비스 캐빈의 공연 연출을 도맡아 히 파이브/히 식스를 스타로 만들었고 TBC 프로그램 <쇼쇼쇼>의 성공을 이끌었다. 쎄시봉의 멤버로 잘 알려진 이장희 선생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그건 너>, <한 잔의 추억> 등을 만들어 불렀고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 했었지>, 김완선의 <이젠 잊기로 해요> 등을 만들었다. 필진은 개정 작업의 의의로 세 가지를 든다.

"첫째, 가독성이 개선됐어요. 지나치게 많은 인용을 배제하고 윤문에 더 신경을 썼습니다. 둘째, 정밀성을 보강했어요. 일부 부정확한 팩트를 바로잡고 추가했어요. 셋째, 충실성을 살렸습니다. 인터뷰를 추가했고 중요 자료도 더했습니다." (신현준)

▲1980년 3월 발매된 조용필 1집. 한국대중음악사 최초의 100만 장 판매 앨범이다. ⓒ지구레코드

1980년대 방배동에 '발라드 신(scene)'이 있었다

새로 출간한 1980년대 편의 부제는 '욕망의 장소'다. 단연 눈에 띄는 부분은 음악과 지역성을 연관해 서술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이다. 조용필로 시작하는 책의 1장이 집중하는 곳은 여의도다. 이후 나훈아와 주현미, 윤수일 등이 등장하는 2장의 장소는 영동, 곧 지금의 강남권이다. 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방송 프로그램 <젊은의 행진>과 <영11>을 통해 캠퍼스 가요를 소개하는 3장은 광화문과 정동으로 이동한다. 서초동과 신촌, 대학로, 파고다극장과 이태원, 강동이 이런 식으로 책에 소개된다.

"김학선 저자가 자신을 '1990년대의 아이'라 불렀는데 저는 '1980년대의 아이'였어요. 서울 강동 쪽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는 다운타운이라 부르는 중심지를 가야만 마음에 드는 음반도 사고 공연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 작업을 하면서 제가 살던 동네에도 전설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승환의 '우리기획'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인근에서 헤비메탈의 모색(메탈컴퍼니와 메탈프로젝트)이 벌어졌고, 트로트 메들리 [쌍쌍파티]도 탄생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로웠어요." (최지선)

필자들은 특히 이 책을 통해 방배동을 중요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토요일, 토요일이 좋던' 지역 카페촌을 통해 하광훈과 조덕배, 지예를 소개하는 장이다.
"제가 1980년대 편 자료 작업에 합류하면서 초고를 보고 감탄한 부분이 방배동을 다룬 9장이에요. 저도 나름대로 가요를 좀 안다고 자부했는데, 이 때(1980년대 후반) '방배동 신(scene)'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어요. 80년대 말~90년대 초 가요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이곳에서 발굴됐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보죠." (김학선)

책에 따르면 이렇다. 1980년대 말 가요계를 평정한 변진섭이 스타가 되기 전 주로 찾던 곳은 강남구 방배동 삼호아파트 뒤편이었다. 변진섭을 비롯해 훗날 <꿈에>를 부른 조덕배, <세월이 가면>을 부른 최호섭, 작곡가 김지환, 하광훈 등의 '무명가수' 들이 방배동 문화의 산실인 여러 카페에서 밤마다 출연료 없이 기타 하나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책은 여기서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한다. 그 결과는 이문세-변진섭-신승훈으로 이어지는 한국 '발라드' 계보의 생성이다. <한국 팝의 고고학> 전권에서 유지되는 집념의 연구 태도를 맛보기 격으로 살짝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방배동 카페촌의 전사(前史)는 '포장마차들이 이곳에 모여 들던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계기의 하나로 고급스러운 카페와 레스토랑의 효시인 '장미의 숲'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을 빼놓을 수 없다. (...) 1987년의 한 기사에 의하면 이 영역에 줄지어 선 카페 100여 개는 열 평 안쪽의 작은 공간으로 주로 젊은 층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1970년대 말 포장마차촌에서 4년 뒤 환락가로 변하고, 다시 5년이 지나 또 한 번 탈태(奪胎)하면서 방배동은 신사동과는 다른 기호를 얻게 된 것이다. (...) '카페 음악'이라는 부제에서 보듯 미스틱 무드는 카페의 수요에 부응했다. 즉 무수한 '미스틱 무드' 음반들이 무수한 '디스코 메들리'와 더불어 1980년대에 소리 소문 없이 팔려 나갔다. (...) 1980년대 중반까지 발표된 느린 템포의 가요들, 즉 발라드가 장르로 확립되기 이전의 많은 가요의 편곡은 미스틱 무드의 작법을 취했다. (...) 방배동 카페 가운데 음악의 생산과 소비를 위해 중요했던 곳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방배동에는 퀘스천, 화려한 목요일, 장미의 숲, 쁘라코프, 휘가로, 아마데우스, 시나브로, 아라신, 제임스 딘, 아프로디테, 회색도시, 조이 등 라이브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곳들이 있었고, 그 위치는 다음 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지도가 등장함. 책은 지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이후 저자들은 각 카페의 특징과 이곳에서 활동한 훗날 스타들의 이름을 정리하고 '방배동 사단'의 활약상을 앨범을 따라 짚는다. 아울러 1980년대 후반 들어 방배동 사단을 통해 당시 한국 대중음악 제작자와 매니저의 세대교체가 일어났다는 점을 독자에게 알린다. 이는 당시 개방을 시작한 한국 사회와도 연결고리를 갖는다는 점 또한 저자들은 설명한다.
"방배동 신을 소개하는 대목의 설명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Ballade pour Adeline)>(1977)로 시작해요. 기실 발라드는 장르가 아니라 스타일이지만 한국에서는 장르화해 소비되는데, 그 논의의 출발을 우리 책은 이 '경음악'으로부터 시작했어요. 이들 '이지 리스닝' 경음악에 실재하는 악단인 미스틱 무즈 오케스트라(Mystic Moods Orchestra)의 이름을 차용해 '미스틱 무드'로 장르화하고 이게 훗날 우리가 아는 '발라드'로 정착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우리 작업의 성과라고 생각해요. 80년대에 약간 가벼운 '삼태기 메들리' 류의 편집 앨범과 함께 많이 팔린 게 카페나 미용실에서 틀던 '경음악' 편집 앨범이라는 점을 짚은 것도 '방배동 신' 부분이 중요하게 본 부분이에요. 관련한 큰 이야기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 사이 빠진 연결고리를 잇는 작업을 우리가 했다고 생각해요." (최지선)

▲1995년 발매된 김건모 3집. 한국 팝 사상 최다 판매 음반이다. ⓒ라인

'댄스 팝 생산 공장'이 아이돌 시대의 문을 열다

아무래도 40대 이하에게 가장 익숙한 발굴의 시기는 1990년대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두 차례(1994, 1997)나 소개한 시대다. SM이 출범하는 등 지금의 아이돌 팝 체제 기원이 만들어진 때이고, 서태지 현상이 대두해 이전과 이후를 가른 것으로 통상 인식되는 시대다. 표절 논란이 절정에 달했던 때이기도 하다.

까칠한 음악 평론가들이 집필한 책으로서는 의외로 여겨질 정도로 표절 논란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언급된다. 외려 뮤지션들이 매년 한 장 이상의 앨범을 내야 할 정도로 과열된 당시 '뽕 댄스' 판의 분위기가 표절에의 유혹을 낳았다고 지적하는 등 책은 당시 시대상도 폭넓게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 발전이 이 시대 댄스 음악의 주류 경향에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점을 지적한 대목은 의미 있게 여겨진다. 인터뷰에 참여한 룰라의 이상민은 "아카이 샘플러(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유행하던 샘플러)가 나오면서 댄스음악을 만들기 쉬워졌"고 그로 인해 "댄스 가수가 많이 나오고 DJ들도 작곡가로 많이 전환했다"고 말한다. 이상민도 샘플러를 활용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창작자의 길에 합류했다. 이 시대상을 두고 책은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이상민이, 그리고 룰라가 자기 색깔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은 김지현이 솔로로 독립한 뒤 아프리카계 독일인 마이키 로메오(Mikey Romeo)가 가세한 5집(1997)이다. (...) 이 앨범은 어쿠스틱 악기를 이용하는 고전적 작곡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디지털 샘플러를 '과속'으로 공부해서 '그럭저럭 들을 만한' 가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앨범은 1990년대 주류 가요의 관습인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 앨범이 되었는데, 그 '다양한 장르'는 버튼 몇 개를 누르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테크놀로지에 힘입은 것이었다."

우리는 이 시대 댄스음악을 평정한 여러 이름을 익히 알고 있다. 윤일상, 주영훈, 김창환 등이 대표적인 이름이다. 옛 가요의 '뽕끼'와 당대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 유행한 클럽 음악에 록 비트가 교묘히 뒤섞인 이 시대 댄스가요들은 요즘 노래와 비교하면 매우 이질적이면서도 '희한하게' 우리 귀를 오랫동안 잡아챈다. 이 가운데 특히 김창환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김창환 사단'이 시대를 평정한 라인음향과 관련한 시기를 더 자세히 소개한다. 신현준 교수가 "한국 팝의 상업적 전성기는 1994년에서 1997년"이라고 강조한 대목과 김창환 사단 전성기가 겹친다. 라인음향이 이 시대에 배출한 슈퍼스타는 다음과 같다. 신승훈, 김건모, 박미경, 노이즈, 클론이다. 각각 <보이지 않는 사랑>, <잘못된 만남>, <이유 같지 않은 이유>, <상상속의 너>, <쿵따리 샤바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이름이다. 이들 모두가 라인음향 소속이었다. '인하우스' 시스템은 SM이 먼저겠지만 라인음향은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가동했다.

단순히 히트 가수들의 이름만 나열했다면 <한국 팝의 고고학>이 이처럼 칭송받지 않았을 것이다. 책은 라인음향의 인하우스 시스템에 주목한다. 이 시기 라인음향의 대표는 사맹석인데, 책은 그가 "연세대 교육학과 출신으로 대학 시절 DJ 생활"을 했다는 점을 소개하고 김창환이 이사 직함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책 곳곳에서 저자들은 음악계 인맥이 우리가 아는 음악 탄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셜록 홈스처럼 추적하고 추리해 독자에게 소개한다.) 이어 "라인음향의 지향은 현재의 케이팝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추구하는 방식의 원형을 보여준다. 사무실, 작업실, 녹음실, 연습실 등을 구비하고 작곡, 프로듀싱, 안무 등 모든 작업이 한 건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토털 매니지먼트'의 초기 형태가 시작되었다"고 책은 설명한다. 이제 인하우스 시스템이 무엇인지 감이 온다. 1960년대 초반 뉴욕 팝 음악을 설명하는 단어인 '브릴 빌딩 시스템'이 떠오른다.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빌딩에 정시 출근해 팝을 '찍어내던' 시스템이다. 국내에서 '팝 음악 공장'이 가동됐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라인빌딩은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있었다. 여기서 "작곡가 및 프로듀서인 김창환이 음악 기획 전체를 관장했다." 김창환의 '방배동 친구'였던 박광현과 신재홍이 초기 주요 작곡가로, 이어 신재홍의 대학 후배인 김형석이 중요 작곡가로 등장한다. 편곡과 프로듀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김우진의 이름도 거론된다. 강원래는 라인빌딩에서 안무를 담당했고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구준엽이 앨범 아트워크 작업을 도맡았다. 둘은 물론 대중에게는 클론으로 더 잘 알려졌지만, 근본적으로 이 라인빌딩 '팝 음악 공장'의 중요한 생산자였다. <한국 팝의 고고학>이 큰 가치를 지닌 저작물인 이유는 이처럼 당대 팝을 만든 실질 생산자에게 조명을 비춰주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늘날 케이팝 체제의 틀이 되는, 곡 창작 과정의 일관된 공정 흐름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라인음향에서 본격화했다는 의의를 책은 독자에게 전달한다.

▲<한국 팝의 고고학>(신현준, 최지선, 김학선 지음) ⓒ을유문화사

IMF 외환위기 전후 한국음악의 변화

90년대에는 80년대의 1987년(민주화) 만큼 중요한 시기가 있다. 딱 10년 후인 1997년 발생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다. 80년대 편을 읽은 독자라면 알겠지만, 80년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테마인 '성장'이 바로 이 같이 급격한 전환과 연관된다고 책은 기술한다. 그렇다면 90년대의 사회상도 당대 음악에 반영됐을까. 우리 기억의 주류는 아무래도 댄스음악이다. 

"음반 사전 심의 철폐부터 중요한 사건이에요. 1996년 (정태춘과 박은옥의 노력으로) 사전 심의제가 철폐된 직후 패닉의 2집 [밑](1996)이 나와요. 사전 심의제가 있었다면 이 앨범이 가위질 당하지 않고 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 뒤 인디 폭발도 불가능했을 거예요. 이처럼 사회의 변화는 이 시대 음반에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쳐요." (김학선)

"1990년대의 큰 사건으로 3당 합당도 있죠. 김영삼 당선 직후 1위곡이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예요. 직전은 신해철, 공일오비에요. 벌써 다르죠? 한국 팝의 상업적 피크기인 1994년~1997년 시기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무너지죠. 이 시기 별들의 전쟁-그야말로 한국이 흥청망청할 때죠-이 일어나고 직후 발생한 사건이 IMF 외환위기 사태입니다. 직전에 HOT의 <캔디>가 유행할 정도로 낙관적이었다면 바로 직후에는 GOD가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다고 노래하죠." (신현준)

90년대 편의 부제는 '상상과 우상'이다. 80년대를 질주한 한국은 숱한 우상을 만들었다. 신해철, 서태지, 듀스, HOT 등이 90년대에 탄생한 위대한 이름이다. 직후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우상은 무너졌다. 하지만 그 폐허에서 SM과 JYP, YG 등 오늘의 아이돌 시스템으로 이어질 단초가 마련됐다. 90년대 격렬했던 별들의 흥망이 훗날의 케이팝 열풍을 예고했다. 

이 시대는 또한 인디 폭발의 시기였다. 1980년대 신촌과 대학로의 '언더그라운드'가 1960~1970년대 한국 록과 포크의 뿌리로부터 이어져 온 그룹사운드-기타-남성성을 상징하는 단어와 함께 성장했다면(들국화를 들 수 있겠다), 90년대의 인디는 단절됐다. 보다 정확히는 (80년대 영국이 아니라) 90년대 미국의 펑크(Punk) 리바이벌이 짧은 시간차를 두고 홍대의 클럽 드럭(Drug)에서 일어났고, 이는 곧 이른바 '모던 록' 열풍과 맞물려 현상이 됐다. 책은 삐삐밴드-(홍대 앞) 발전소-자우림-크라잉넛 등의 이름을 통해 강렬했던 인디 폭발의 시기를 정리하며 90년대 발굴을 마무리한다.

고고학이 앞으로도 이어질까

책은 놀랄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90년대 한국 팝과 대만 팝의 연결고리, 이전 시대 한국 팝과 일본 팝의 연결고리를 짚는다. 80년대 편에서는 운동권 음악을 한 챕터를 할애해 집중적으로 조명했고, 헤비메탈 신의 흐름 역시 섬세하게 짚었다. 90년대 알앤비 신의 성장, 듀스에서 드렁큰 타이거로 이어지는 초기 힙합 신의 흐름도 빼놓지 않고 충실히 책은 정리했다. 단언컨대 이 기획에서 아쉬운 점이라고는 현철-송대관-태진아 등으로 이어지는 90년대 트로트 신이 빠졌다는 점뿐일 것이다…(설운도는 월드뮤직의 한 갈래로 소개된다). 이처럼 방대한 한국 팝의 역사가 네 권의 책 2607쪽에 걸쳐 설명됐다. 

앞서 책이 80년대 편에서 장소에 집중해 시대 흐름을 정리했다고 밝혔다. 90년대 편에도 장소는 당대 팝 흐름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다만, 굴곡이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연구한 신현준 교수의 관심이 묻어난다.

"장소는 계속 변화했어요. 재즈 피아니스트 정원영이 1991년 <강남 어린이>라는 곡을 썼어요. 이 곡은 장필순이 3집(1992)에 실었죠. 이 때 강남은 이후 김현철이 상징하는 '시티 팝' 시대 강남과 다르고 싸이가 <강남 스타일>에서 노래한 강남과도 다른 장소죠. 장소성에 집중해서 보면 팝이 설명하는 시간의 경과를 포착할 수 있어요. 옛날에는 '팝' 대신 '팝스(Pops)'라는 말을 썼어요. 이게 전 맞다고 생각해요. 한국에는 여러 장소가 있고, 거기마다 팝이 있죠. 책은 아무래도 서울에 집중했지만(광주와 부산도 거론된다), 서울 안에서도 이처럼 여러 '팝스'가 존재했어요. 시간이 지난 후에 보면 그 다양함이 보이죠. 장소의 구분만으로도 한국 팝을 훨씬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어요." (신현준)

마지막으로 필자들에게 차마 이 방대한 양에도 불구하고 조명하지 못해 아쉬운 부분은 없는지 물었다. 아쉬운 점은 물론 있다. 몇몇 중요한 인물의 인터뷰가 성사되지 못했다. 필자들은 여성 음악인을 더 조명하지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겼다.

"여성음악인에 대해서는 짧게나마 언급하려고 노력했어요. 장필순, 한영애 같은 베테랑은 물론이고 걸 그룹이나 걸 파워와 관련한 내용을 실었죠. 그렇지만 '제대로 된' 발굴과 조명이 더 필요하다는 점은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최지선)

대전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범룡, 신신, 신승훈으로 이어지는 뮤지션 계보가 있는 곳이다. 당시 유성 관광특구 지정이 한국 대중음악에 미친 영향을 집중 조명하지 못해 아쉽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더 중요하게 남은 질문이 있다. 이미 90년대도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옛날이야기다. 지금 00년대 10년을 다루더라도 아주 오래된 기억이다. 다음 작업으로 '2000년대'를 발굴할 의향들이 있을까. 저자들은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겨두겠다고 밝혔다. 

"현준이 형은 '이제 젊은 애들이 해라'고 하세요. 농담처럼 차라리 자기는 '1950년대'를 발굴하겠다고도 하죠. 일단 저는 안 한다고 했어요. 그 후 시대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에 놓친 지점이 많이 보여요. 80년대에 일본과 관련한 이야기, 90년대를 포함해 한국 팝 전 시대와 관련한 교포 이야기가 더 깊이 다뤄질 필요가 있죠." (최지선)

"90년대까지는 '고고학'의 시대라고 볼 수 있지만, 음원이 디지털화 하고 이후 아예 스트리밍으로 옮겨간 2000년대 이후는 조금 달리 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후배들의 몫이죠. 난 이제 '아시안 팝의 고고학'을 세 권으로 출간해야 할 것 같은데?" (신현준)

[이대희 기자(eda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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