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 길을 찾을 것이다, 이들 덕분에
범죄 가담자 규모만 최소 6만 명. 조주빈 등 주범 세 명에게 선고된 형량은 징역 15년, 34년 그리고 42년. 확인된 피해자만 1154명. 그중 20대 이하 아동·청소년 피해자가 대부분인 최악의 집단 성폭력 실화. ‘텔레그렘 n번방·박사방 성착취물 제작과 유포 사건’을 다룬 두 편의 영화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와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장편경쟁 대상 수상작 <정순>. 실제 사건이 일어난 지 2년이라는 짧은 시차만을 두고도 높은 완성도로 관객을 찾았다.
<사이버 지옥>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 대담한 사회고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최진성 감독의 신작이다. 최 감독은 전작 <더 플랜>(2017)과 <저수지 게임>(2017)에서 취재의 주체로 현장을 누비면서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증거를 확보하는 마이클 무어식 탐사보도를 수행했다면, <사이버 지옥>에선 앞서 기록한 자들의 노고를 받들고 이미 일어난 사건을 정직하게 보고하며 실화를 재배열하는 올리버 스톤식 논픽션 내러티브를 조형한다. 국내 독립영화계에서 굵직한 작품을 탄생시켜온 제작사 ‘인디스토리’가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넷플릭스와 손잡고 내놓은 작품이란 사실도 눈에 띈다.
정지혜 감독의 장편 데뷔작 <정순>은 동네 식품공장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 정순(김금순)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다. 언제나 귀여움을 잃지 않고 활기차게 살아가던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지만, 사랑의 쾌락은 이내 디지털성폭력의 지옥으로 변모한다. 모텔 방에서 속옷을 입고 몸을 흔들며 노래 부르는 영상이 남자친구와 회사 상사의 갈등으로 ‘누출’된 것이디. 정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정순>은 실제 사건을 지시하지 않지만, 디지털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크게 촉발한 n번방 사건의 자장 아래 있는 영화다. 한 편의 다큐와 한 편의 극. n번방은 어떻게 영화가 될 수 있을까?
기자의 윤리, 인간의 윤리
<사이버 지옥>의 논픽션 내러티브는 언론을 주제로 한 기존 극영화들의 클리셰(진부한 표현)를 압도한다. <사이버 지옥>의 ‘n번방 저널리즘’에는 두 가지가 없다. 하나는 경쟁 클리셰다. 영화가 관심을 두는 건 거대한 특종을 눈앞에 둔 언론사 간 취재 경쟁이 아니라, 사회를 뒤흔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그 표면 아래 잠든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협력과 연대다. 이런 매체적 상호작용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2017)에 비할 법한 뛰어난 스토리텔링으로 전개된다.
<한겨레>가 온라인 메신저 텔레그램 환경에서 자행되는 여성 대상 성착취 사건을 최초 고발한 것이 2019년. 용기 있고 대담한 취재에도 기사는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실패한다. 하지만 이듬해 SBS <궁금한 이야기 Y>와 JTBC <스페셜 탐사 스포트라이트>가 <한겨레> 보도를 이어받아 판을 키운다. <사이버 지옥> 속 저널리즘 양상은 상대 언론의 실패가 다른 언론에 기회가 되기보다는, 그 뒤 남겨진 임무를 넘겨받고 계승해 새로운 진실을 들춰내고 세상에 파급하는 언론 공동체의 여정이다. 취재와 보도에 시차를 두고도 서로의 과거와 현재, 미래 취재를 보완하고 각자의 언어로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다.
두 번째 없는 것은 영웅주의다. <사이버 지옥>은 직업적 사명으로 무장한 영웅의 목소리가 아닌, 뼈아프게 실패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려다 끔찍한 윤리 게임에 직면한 고뇌하는 인간의 목소리로 n번방 취재기를 들려준다. 언론이 관련 기사와 방송을 공개할 때마다, 박사방에선 ‘한겨레 피해자’ ‘SBS 피해자’ ‘스포트라이트 피해자’가 차례로 탄생한다. 저널리즘은 아주 작고 저 방(n번방)은 매우 크다. 방 안에는 많은 위험이, 그리고 가능성이 있다. 영화는 <한겨레>의 김완·오연서, <궁금한 이야기 Y>의 정재원, 그리고 <스페셜 탐사 스포트라이트>의 장은조·최광일의 취재기를 통해 기자의 윤리를 넘어선, 인간으로서 윤리를 함께 고민한다.
“취재보다는 신고” 불꽃의 등장과 장르 전환
<사이버 지옥>의 장르 전환은 학생기자 그룹인 ‘추적단 불꽃’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기사 작성 공모전을 준비하던 ‘불’과 ‘단’은 앞선 저널리즘 주체들과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한다. 취재와 수사라는 전문적이면서도 특권적인 활동 영역의 바깥에 있는 그들은 ‘추적단’이란 이름 아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선다. 불꽃의 자리는 ‘탐정’의 자리다. 사설탐정은 종국엔 경찰에게 자신이 발견한 모든 것을 넘긴다. 비질란테(수사단)적 수행을 적절한 시기에 자발적으로 멈추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들은 “취재보다는 신고”를 우선한다는 목표로 n번방을 추적했다고 말한다. 기자와 경찰, 저널리즘과 수사정신. 둘 사이를 연결하는 불꽃의 활약이 사건 주체들의 중심에 서며 미스터리는 시작되고 관객의 궁금증은 커진다.
그러나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부상할수록 재현 문제도 함께 떠오르며 창작자에게 잔혹도, 표현 수위, 각색에 대한 고민을 안긴다. 성폭행당한 육체, 토막 난 주검, 유혈이 낭자한 사건 현장…. <사이버 지옥>은 두 가지 방식으로 문제를 돌파한다. 하나, 실사 재현이 아닌 일러스트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피해자 상황을 묘사한다. 둘, 성폭력 사건을 다룬 전문가들의 사건 코멘트를 크레디트에 삽입해 직접적으로 주제를 강조하고 관객에게 행동 변화를 호소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사건의 중심에 추적단 불꽃이 있었고, 기자도 수사관도 아니지만 정의로운 ‘중간자’ 위치에 선 그들의 시선이 영화 내부에서 단단하게 작동하며 피해자들의 경험이 증언되고 정직하게 복원됐다는 사실이다.
성폭력 실화를 다룬 남성 감독들의 미스터리영화 몇 편이 있었지만, 이들 영화는 모두 피해자 여성이 아닌 주변 다른 주체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특히 피해자 목소리의 직접적 재현이나 애도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가니>(2011)와 <한공주>(2013)에서 성폭력 묘사는 관객에게 트라우마가 될 만큼 착취적이며, 같은 피해를 겪었을 관객을 타자화하고 마는 처참한 재현 실패의 영화였다. <시>(2010)에서 성폭력살해 피해자는 주검이 되어 오프닝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미장센으로 기능할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자의 시선으로
<사이버 지옥>이 담지한 불꽃의 시선은 중년의 디지털성폭력 피해자인 ‘정순’을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 <정순>이 취한 태도로 연결되며 두 편의 ‘n번방 영화’를 하나의 연속체로 보이게 한다. <정순>은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자의 서사만을 단단하게 고집하며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과장 없이 재현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제1주체는 피해자 본인 정순이다. 정순은 피해자의 전형이 되기를 거부하며, 단독의 경험을 최대한 구체화하고 개인적 차원의 정의를 실현하며 피해 사실에서 스스로 회복해간다. <정순>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위로하고, 애도하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n번방 영화’를 완성해낸다.
<정순>의 감독 정지혜는 1995년생. 추적단 불꽃의 ‘불’이자 현재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인 박지현은 1996년생이다. n번방 언론 보도가 계속 이어진 것은 소셜미디어의 여성 사용자가 중심이 된 ‘#n번방_공론화’ 해시태그 운동 덕이었다. 이 젊은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과 그것을 기반으로 완성된 두 영화는 우리 사회의 취약함, 우리가 겪는 혼란스러움, 우리가 느끼는 공포를 헤쳐나가야 할 이유를 찾도록 촉구할 것이다. 더 안전하며 정의로운 사회로 진보할수록, n번방은 계속 말해지고 계속 영화가 되리라는 선언이다.
남지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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