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상징 '알천'에는 돌 233개가 놓인 징검다리가 있다

2022. 5. 2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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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의 문화산책] <45>  경주 알천과 안압지(월지)  

[김유경 언론인]
현대에 와서 월지에 신라 때와 달라진 것이 생겼다. 신라시대 월지 입수의 근원은 경주 북쪽 알천(북천)의 물이 분황사를 거쳐 월성 주변의 해자를 채우고 월지로도 흘러들었다. 그 후 천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며 농경지 등으로 북천의 물줄기가 점점 막혀가고 1975년 북천(알천)이 발원하는 곳에 덕동호가 건설된 뒤에는 자연의 물길이 더 메말라 버렸다. 보조 수단으로 관정을 뚫어서 물을 얻어 제2의 입수구로도 활용했으나 그것도 충분치 못했다. 그 위에 농수로 물에 스며든 비료 성분이 그대로 입수되면서 월지 물이 녹조를 형성하기 때문에 수시로 이를 거둬내야 하는 난제가 생겨 여러모로 감당이 안 됐다.

▲사진1. 7세기 월지 조영 당시의 고유한 배수로. 비석 모양을 한 몸통에 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5개의 배수구가 있다. 현재는 이 배수구 바로 뒤에 현대식 배수로를 건축해 배수시킨다. ⓒ이순희

자연 수로를 이용한 북천 물길의 입수가 여의치 않게 되니 2003~2008년 사이에 남천이 지나는 박물관 후문 부근에 강력한 모터를 묻고 남천의 물을 끌어와 안압지에 물을 대기 시작했다. 2개의 모터가 교대로 하루 20시간씩 가동하면서 남천 물을 끌어 올려 수로를 통해 못으로 떨어지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월지의 현대식 입수 과정은 오랜 기간 월지 담당 공무원을 지낸 정희영 씨의 증언으로 확인되었다.
"남천의 물을 끌어다 펌프로 입수한 물은 연못 전체 구석진데 까지 물이 고루 가 닿도록 섬 세 개로 유도되어 물살이 갈라져 흐르다가 배수구를 통해 빠져나갑니다. 그러면서 월지에 면한 연꽃 논에 물을 대고, 더 흘러서 계림을 거쳐 나가며 다시 남천으로 유입됩니다. 과거엔 그냥 농경지로 물이 배수되어 나갔습니다. 입수구 바로 앞의 큰 섬과 배수구 바로 앞에 있는 중간 섬과 작은 섬이 그 위치를 가지고 월지 전체 물길을 다스립니다."

▲사진2. 월지 배수 시설의 구조. ⓒ김남일 

▲사진3. 돌 비석처럼 생긴 7세기 월지의 배수구. 다섯 개의 배수 구멍이 뚫려있다. 물과 맞닿은 곳에 구멍이 슬쩍 드러나 있고 새로 연결된 현대식 배수구 길이 지표면에 보인다. ⓒ이순희

배수로는 입수로에서 대각선 방향, 중간 섬이 들어선 북쪽 모서리에 있다. 호안에 붙어 비석처럼 생긴 1.5미터길이의 몸통 돌에 지붕돌을 얹은 조형물이 원래의 신라시대 배수구 장치이다. 못 바닥에 장대석 2단을 놓은 위에 올라선 몸통 돌에는 높이가 다른 다섯 개의 배수 구멍이 나무 마개로 막혀있다. 월지를 복원하면서 이 7세기 배수구 유물 뒤로 기계식의 새 배수시설 수문을 만들었다. 땅 표면에 배수로를 따라 투명유리를 깔아 위치 표시를 했기 때문에 못가를 걸으면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월지에 들어온 물은 물넘이 방식으로 넘쳐서 배수되는 것이 아니라 못 바닥에서 배수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입수되는 물과 배수되는 물의 양이 같도록 조절합니다. 수문에는 7세기 배수구 뒤에 새로 만든 돌문이 있어 물 나가는 구멍이 높이에 따라 3개 만들어져 있고 그 뒤에 또 다른 현대식 수문이 있어 갑문처럼 올리고 내려 작동합니다. 평상시에는 맨 아래쪽 배수구를 2~3㎝ 열어놓고 매일 수동으로 조절하여 배수하면서 연못물 수위를 유지합니다."

정희영 씨가 설명하는 현장의 배수 과정이다.

안압지의 섬 3개는 도교적 신선사상으로 정원의 철학을 완성하기도 하면서 입수, 배수와도 관련되어 물이 한군데로 모이지 않고 섬 양쪽으로 갈라져 고르게 흐르도록 한 기능을 겸했다. 3개의 섬 중 가장 큰 섬은 330평(1094㎡), 중간 섬은 180평(596㎡), 제일 작은 섬은 18평(62㎡) 넓이다. 월지의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 원리가 보인다.

월지 물을 알아보는 과정에 경주를 둘러싼 네 군데 산 지형 안에서 사방으로 흐르는 물길을 구분해 알아보기가 엄청 복잡했다. 그중 알천이란 신라 때부터의 이름을 가졌고 동천이라고도 불리는 북천은 신라사 초기부터 중요한 위상을 보여서 건국의 장소 나정과도 연관되며 월지로 들어오는 물줄기이기도 했고 신라의 정권 다툼과도 연결된다. 지대가 낮은 경주 시 한복판을 흐르는 알천은 홍수가 잦아 왕릉이 유실된 적도 있을 만큼 홍수 피해가 컸다. 경주 가는 곳마다 조그맣게 또는 큰 줄기로 흐르는 북천 물을 만나는데 이 북천 물은 있다가도 안보이고 안 보이다가도 맹렬한 기세를 보이며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경주의 남천에는 월정교가 있고 서천에도 현대식 긴 교량이 가로질러 있어 금방 그 존재가 드러나는데, 북천인 알천은 수없이 역사에 기록되고 중요한 역사 현장이기도 하면서 물을 건너는 제일 긴 다리는 돌 징검다리였다. 월성 해자는 최근의 발굴로 그 구조가 드러나는 중이고 계림에 들어가면 거기서도 도랑이 있어 물이 흘렀다. 그 물이 월지에서 배수된 물이고 다시 흘러 남천으로 빠져나간다. 월지는 경주 한복판에서 그런 물줄기를 활용한 저수지, 대궐 방어를 위한 해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학자들이 경주의 물길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의 것으로 예를 들면 계명대학 배상근 교수의 경주 지하수 연구는 강수량 통계치를 토대로 경주 지하수와 고대 우물과 연관시킨 것이고, 김호상 진흥문화재단 이사장의 논문은 고대 신라의 북천이 지금의 북천과는 아주 다른 형태였다는 것을 고찰한 논문이다.

"고대의 북천은 마치 손가락을 쫙 편 것처럼 지류로 흐르던 것이었으며, 지금과 같은 큰 지류를 형성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는 북천에 다리를 놓은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직 홍수의 역사가 전하는데 알천의 물이 불어나 김주원이 제때 대궐에 들어오지 못한 것을 계기로 신라 하대 왕권의 대변혁이 시작된 사건도, 그 장소가 어디인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4. 동천동 금학산 아래 1707년 알천의 물길을 보수하고 그 사실을 기록해 둔 알천수개기(修改記)가 새겨진 암벽. 이곳은 자고로 홍수가 많이 일어나는 곳이었던 듯 신라·고려·조선시대에 이르도록 물길을 다스리는 치수정책이 행해졌다. ⓒ이순희

이런 북천(알천)을 두고 치수 정책을 펼친 고려 및 조선시대 유적 알천수개기가 남아 전한다. 수(水)자원 연구자인 영남대학의 이순탁 교수가 1980년 찾아냈다. 북천이 형산강과 만나면서 기역(ㄱ)자로 꺾어지는 곳, 동천동 금학산 아래 도로의 이름이 '알천로'인데 고려시대에 쌓은 제방이 있던 자리로 조선 숙종 때 와서 경주부윤 이인징이 제방을 고치고 기록을 남겼다.

'알천 물에 고려 때 쌓은 읍성 제방이 무너지매 정해년(1707)에 다시 개수하여 지형 따라 잡은 물갈래는 옛 길대로 물을 터주었다. 여기 암면에 공사 책임자 등 사실을 적어 길이 후세에 전하려고 한다'는 내용의 알천수개기(閼川修改記)가 산등성이 화강암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왕조가 바뀌어 가면서도 대응한 치수의 중요성이 드러나 보인다.

이 동네 마을 이름은 제방을 쌓고 숲을 조성하였기에 쑤머리(숲머리 마을)이라 부른다. 수개기가 있는 금학산 아래 북천을 건너는 징검다리 돌은 233개의 육중한 바윗돌들을 나란하게 설치했다. 길이가 50미터는 넘어 보였다. 경주의 알천을 보기 위해선 이곳 수개기가 있는 산등성이 아래 징검다리를 와보아야 한다. 대궐 바로 옆 남천에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60여 미터 길이의 월정교가 있는데 알천엔 역사적으로 다리가 놓였던 적이 없고 돌 징검다리라니 경주를 좀 더 깊이 바라보는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 징검다리가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는 못 알아봤다. 주변에는 헌덕왕릉이 있는데 알천의 범람에 피해를 입었는지 능 앞의 석물 같은 것은 사라졌다. 1995년에 와서 아래쪽 폭이 좁아지는 자리에 알천교가 생겨났다.

▲사진5. 수개기의 글자들. 조선 숙종 때인 1707년 공사를 담당했던 사람들의 이름과 공사 내역이 적혀있다. ⓒ이순희

▲사진6. 알천 수개기 벼랑 아래로 흐르는 알천에는 233개의 큼직한 돌 징검다리가 놓였다. 경주의 상징이기도 한 알천을 알려면 이곳 알천로의 수개기와 알천 흐름을 보아야 한다. 현대에 만들어진 알천교가 근방에 있다. ⓒ이순희

▲사진7. 알천에는 신라시대에 다리가 놓였다는 역사 기록이 하나도 없는데 비해 월성대궐 옆으로 흐르는 남천에는 경덕왕 때 요석궁 근처에 길이 60미터의 월정교 다리가 놓였다. 최근 복원됐다. 남천에 비치는 달이 어여뻐서 월정교란 이름이 붙었을까? ⓒ이시영

[김유경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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