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압도한 흡인력…‘자연다큐의 마블’은 어떻게 탄생했나

한겨레 2022. 5. 2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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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낯선 사람][한겨레S] 김도훈의 낯선 사람 : 데이비드 애튼버러
다큐계 압도적 아이콘 애튼버러
마법같은 목소리의 해설자이자
반세기 동안 제작자로 한 우물
OTT ‘선사시대’로 놀라움 안겨
데이비드 애튼버러는 지구 구석구석을 찾아 동물들을 직접 촬영했다. 사진은 다큐에 직접 등장한 애튼버러의 모습. 영상 장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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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그렇지만 나도 요즘 오티티(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에 푹 빠져 있다. 미디어를 보고 논평을 하며 벌어먹는 직업이라 모든 오티티 서비스를 구독 중이다. 아마도 이 글을 보는 상당수는 40대 이상으로서, 익숙한 오티티는 <오징어 게임>의 국뽕에 취하기 위해서 구독을 시작한 넷플릭스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각 오티티별 특성을 설명하며 이 글을 시작할까 한다. 이게 다 여러분의 자산 절약을 위해서다. 모든 오티티를 다 구독하려면 매달 10만원에 가까운 돈을 지불해야 한다. 오티티의 수는 거의 매년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 오티티 세계에 입문하려면 자신의 취향을 따져보고 구독할 가치가 있는지 미리 진단해야 한다. 일종의 엠비티아이(MBTI) 테스트 같은 게 필요하다.

비비시 자연다큐 해설자를 기억한다면

먼저 넷플릭스. 규모가 가장 큰 만큼 오리지널 콘텐츠도 많다. 한국 시장에 투자를 많이 한 덕에 한국 콘텐츠도 다양하다. 문제는 양이 질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넷플릭스의 장점은 다큐멘터리다. 이 분야에서는 지금 넷플릭스를 따라올 상대가 없다. 다음은 디즈니플러스. 디즈니와 마블 팬이라면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사실 이 서비스의 최고 장점은 20세기폭스가 제작한 지난 명작들이다. 숨어 있기 때문에 매번 검색을 해야 하는 게 좀 귀찮긴 하다. 애플티브이플러스. <파친코> 하나만을 보기 위해서라도 구독할 만하다. 양이 적은 대신 오리지널 콘텐츠 품질이 일관적으로 좋다. 양보다 질이라는 소리다. 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애플티브이플러스를 구독해야 할 이유가 새로 생겼다. <선사시대: 공룡이 지배하던 지구>(이하 선사시대)라는 신작 덕분이다.

세상에는 의외로 자연다큐멘터리 마니아들이 많다. 그들은 영화 마니아처럼 시끄럽지 않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하지만 당신이 20년 전 <라이프 온 마스>나 <새의 일생> 같은 걸작 비비시(BBC) 다큐멘터리를 웹하드에서 내려받아 밤새 본 경험이 있다면, 케이블의 ‘비비시 지구’,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디스커버리’ 채널 번호를 손이 기억하고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예전 여성 커뮤니티에서 꽤 히트를 친 글 중 하나는 ‘철없는 남편’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밤마다 몰래 침대에서 기어나가 컴퓨터를 하길래 야동을 보는 줄 알고 급습했더니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를 과자를 처먹으며 밤새 보더라는 증언이었다. 아니 그게 왜 철없는 남편인가. 철이 지나치게 들어 야동에 탐닉하는 남편보다야 훨씬 우수한 남편 아닌가 말이다. 

애플티브이플러스의 신작 <선사시대>는 공룡시대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다. 물론 당신은 이미 훌륭한 공룡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2000년에 디스커버리와 비비시가 함께 만든 <공룡과의 산책>이다. 컴퓨터그래픽으로 공룡을 창조한 그 다큐멘터리는 제법 근사했다. <선사시대>는 그걸 월등히 뛰어넘는다. <아이언맨> 감독 존 패브로와 비비시 <살아있는 지구> 제작진이 애플의 압도적인 자본으로 만들어낸 이 다큐멘터리는 시각적 경이로 가득하다. 놀라울 정도로 발전한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공룡은 시조새 각질까지도 특수효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놀라운 특수효과에 비비시 다큐멘터리 특유의 편집이 더해지니 마치 제작진이 공룡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직접 찍어 온 영상처럼 보일 지경이다. 거기에 한가지 더 중요한 마법이 더해진다. 데이비드 애튼버러의 목소리다.

2019년 4월 데이비드 애튼버러가 비비시(BBC) 새 다큐멘터리 시리즈 <아워 플래닛> 시사회에 참석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당신은 이미 애튼버러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는 특히 비비시 자연다큐멘터리 해설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목소리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직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출연해온 자연다큐멘터리 세계의 아이콘이다. 당신이 케이블티브이나 넷플릭스로 자연다큐멘터리를 볼 때 머리가 희끗희끗한 영감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뭔지 모를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꼈다면, 맞다, 그 사람이 바로 데이비드 애튼버러다. 그는 서구에서는 이미 압도적인 스타다. 애튼버러는 2020년 처음으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는데 배우 제니퍼 애니스턴이 보유하고 있던 인스타그램 최단기간 100만 팔로어 기록을 깨부쉈다. 인스타그램 개설 단 4시간44분 만에 100만 팔로어가 생겨났다. 기네스 기록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공룡도 하나 가지고 있다. 장경룡인 ‘아텐보로사우루스’다.

전설이 된 ‘라이프 온 어스’

데이비드 애튼버러는 1926년에 영국 런던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인 고 리처드 애튼버러는 <간디>, <채플린> 같은 명작을 연출하고 <쥬라기 공원>에서 존 해먼드를 연기한 감독 겸 배우다. 어린 시절부터 동물을 좋아했던 데이비드 애튼버러는 케임브리지대학 졸업 후 1952년도에 비비시에 입사했다. 그의 자연다큐멘터리에 대한 열망은 1954년 런던동물원과 손잡고 만든 <동물의 행동들>(Animal Patterns)부터 시작됐다.

이후 그는 1954년 <동물원 퀘스트>(Zoo Quest)라는 시리즈를 만들었다. 런던동물원의 부탁으로 전세계의 오지에 가서 동물들을 포획해 오는 시리즈였다. 물론 21세기의 애튼버러는 동물을 마구 포획해서 영국으로 가져오는 당시의 다큐멘터리 제작 기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여러 경로로 사과한 바 있다. 1954년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1년 후였다. 지금 보기에는 정치적으로 공정해 보이지 않는 행위도 당시에는 그저 평이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인간은 과거의 실책을 반성하고 새로운 행동의 규범을 만들면서 발전하고 진화하는 것이다.

애플티브이플러스 다큐 <선사시대>는 데이비드 애튼버러가 해설자로 나서 공룡시대를 설명한다. 컴퓨터그래픽이 만든 가상의 지구는 그의 목소리를 거쳐 마치 현실처럼 느껴진다. 사진은 <선사시대>에서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공룡의 모습들. 애플티브이플러스 제공

데이비드 애튼버러와 비비시가 자연다큐멘터리의 마블이 된 것은 1979년 <라이프 온 어스>(Life On Earth)를 내놓으면서였다. 지구의 모든 구석구석에 카메라를 들고 가서 촬영한 동물의 삶을 13개의 에피소드로 만들어낸 이 다큐멘터리는 방영되자마자 전설이 됐다.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자연다큐멘터리라는 것이 황홀한 영상과 내러티브를 통해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놀라운 시각적 경험을 줄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미국의 디스커버리 채널이나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혹은 한국방송(KBS)이 이후 만든 모든 자연다큐멘터리의 규범은 바로 이 작품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2006년도에 자연다큐멘터리에 문외한인 사람조차 제목은 들어봤을 <살아있는 지구>(Planet Earth)가 태어난다. 비비시가 디스커버리, 엔에이치케이와 공동으로 손잡고 300억원을 투자해 5년간 만든 이 다큐멘터리는 인간 지성과 기술의 압도적인 승리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50분 분량의 11개 에피소드로 된 <살아있는 지구>는 매 순간이 경이롭다. 당신은 이 다큐멘터리를 교육용으로 구입했다가 아이들 옆에서 입을 쩍 벌리고 ‘이걸 어떻게 찍은 거지?’라며 찬탄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국 디브이디(DVD), 블루레이 커뮤니티에서는 이 다큐멘터리를 ‘사야 하는 지구’라고 부를 지경이다. 이후 애튼버러는 더 발전된 기술을 무기로 <살아있는 지구 2>를 2016년에 내놓는다. 이 기념비적인 시리즈를 보려면 디브이디를 구입하는 것이 좋지만 그럴 열망까지는 없는 사람이라면 넷플릭스의 <우리의 지구>를 대신 봐도 좋다. 애튼버러와 <살아있는 지구> 제작진이 ‘새로운 다큐멘터리 명가’가 되려고 수백억원의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넷플릭스를 위해 만든, 역시나 압도적인 다큐멘터리니까 말이다.

수억명 시청자 홀린 매력

데이비드 애튼버러는 미디어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다. 그는 돈이 안 되는 부수적인 티브이 프로그램의 영역에 머물던 자연다큐멘터리가 수억명의 시청자를 만날 수 있는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선각자다. 반세기 동안 하나의 영역만을 파고들며 그 영역의 영역을 더 광범위하게 넓히는 데 일생을 바친 선구자다. 노년의 나이에도 자신이 아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동물학적 발견과 영상 기술의 발전을 다큐멘터리 제작에 접목하며 새로운 세대까지 껴안기 위해 노력하는 선도자다. 바로 거기에서 ‘신뢰’가 만들어진다. 스페셜리스트는 점점 사라지고 지나치게 많은 제너럴리스트들이 금방 뜨고 금방 사라지는 한국의 미디어에서는 좀처럼 발생하기 힘든 신뢰다.

<선사시대>의 한 장면. 애플티브이플러스 제공

나는 애플티브이플러스 <선사시대>의 첫 회를 보면서 신뢰가 창조한 마법을 경험했다. 컴퓨터그래픽 공룡들이 해안가에서 헤엄치는 첫 장면. 데이비드 애튼버러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티라노사우루스가 수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체 수컷 티라노사우루스와 새끼들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순간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가상의 이미지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생전 처음 지켜보는 지구의 과거에 경탄하기 시작했다. 만약 내 인생의 몇년을 누군가에게 좀 떼어줄 수 있다면 그건 반드시 96살의 데이비드 애튼버러여야 한다. 당신 역시 이 말에 동의하기를 바란다.

김도훈 |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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