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톈안먼 33주기..인민해방군이 짓밟은 자유화 운동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3회>
국가의 철학이 바뀌면 국민의 운명이 바뀐다...한반도의 현대사를 보라
“국가의 철학(the philosophy of the state)”이 바뀌면 그 나라 국민의 운명이 바뀐다. 세계 여러 나라의 경제 발전사를 경험적으로 탐구해 온 여러 경제학자의 주장이다. 국가의 철학이 사회·경제적 기본 제도를 결정하고, 그 제도에 따라 국민 개개인의 삶이 바뀔 수밖에 없다.
국가의 철학이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면 개개인은 창의력과 자립심을 잃고서 정부의 명령을 맹종하는 노예적 삶을 면할 수 없다. 국가의 철학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때, 혁신과 창조의 정신력이 발휘되어 비약적 경제성장이 가능해진다.
한반도의 현대사가 바로 그 점을 웅변한다. 북한은 공산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을 국가의 철학으로 삼아 온 결과 극빈의 전체주의 체제로 남아있다. 대한민국은 개인의 자유, 보편적 인권, 법의 지배를 국가의 철학으로 삼아 왔기에 최첨단 산업기술과 문화 콘텐츠를 가진 세계 10대 부국으로 성장했다.
지난 70여 년 중국의 역사도 다르지 않다. 마오쩌둥 시대(1949-1976) 국가의 철학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이었다. 그 결과 중국은 대기근의 참상과 문화대혁명 “10년의 대동란”을 겪으면서도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78년 12월 이후 덩샤오핑은 실용주의의 기치 아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후 불과 한, 두 세대 만에 경제 규모 세계 제2위까지 도약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 실용적 개혁개방으로 경제 성장...그러나 국가 철학은 개조 못해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은 “공산당의 철학은 투쟁 철학”이라고 선언했다. 개혁개방 이후 덩샤오핑은 투쟁 철학 대신 경제성장을 위한 실용적인 개혁을 정책 기조로 내세웠다. 마오쩌둥의 주술을 벗어던졌기에 중국의 경제는 연평균 10%의 초고속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국가의 철학을 개조할 수 없었다.
덩샤오핑이 1990년대 천명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모순어법 속에 중국이 당면한 국가 철학의 딜레마가 그대로 표출되어 있다. 덩샤오핑은 경제개혁을 주도했으나 국가의 철학을 바꿀 수는 없었다. 국가 철학으로서의 사회주의가 폐기되면, 중국공산당 역시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중공중앙의 권력투쟁은 국가의 철학을 둘러싼 이념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사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고수하는 보수파와 경제적 자유화를 넘어 정치개혁까지 요구하는 개혁파 사이의 대립으로 펼쳐졌다. 2차 대전 이후 동아시아 신생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발전 궤적을 추적해보면, 1) 경제적 자유화가 2) 정치적 민주화로, 3) 다시 법제 개혁을 거쳐 4) 새로운 헌정 체제로 나아가는 국가 개조의 선순환을 보여준다.
1980년대 중공중앙은 1) 경제적 자유화에서 2) 정치적 민주화로 가는 제1단계의 변화 자체를 좌초시켰다. 그 결과 개혁개방 이후 경제적 자유화와 정치개혁을 이끌었던 이른바 “덩(샤오핑)-후(야오방)-자오(쯔양)” 체제가 1989년 톈안먼 민운(民運, 민주화 운동)을 끝으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개혁개방을 시작한 지 불과 10년 만에 덩샤오핑 정권은 광장의 시위대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다. 자유와 민주를 외치는 시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마할 수 있는 대항 논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결국 “철학적 빈곤”이었다.
자유화 투사 리훙린, 1980년대 중국 공산당의 일당 독재 공개 비판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1회>에서 잠시 소개했던 리훙린(李洪林, 1925-2016)은 베이징에서 폐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에 공개적으로 저항하며 민주화를 추구했던 대륙의 자유인이었다. 그는 1980년대 중국공산당의 반(反)자유화 운동에 맞서서 “신(新)계몽 시대의 자유화 운동”을 이끌었다.
1925년 랴오닝성 서북부 궁벽한 가이핑(蓋平)현의 빈민굴에서 태어난 리훙린은 6세 이후 부모와 함께 유랑 걸식하듯 황허강 유역을 떠돌며 살아야만 했다. 불우한 환경에서도 학문에의 뜻을 굽히지 않고 독학을 이어갔던 그는 힘겹게 산서(陝西)성의 시베이(西北) 농학원(農學院, 농업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서 리훙린은 1946년 3월 30일 중국공산당 지하당 특위 서기였던 그의 스승의 인도로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이후 당의 지령에 따라 학생운동에 투신한 리훙린은 국공내전의 포화 속에서 감시망이 좁혀져 오자 국민당의 봉쇄망을 뚫고 중공 혁명의 성지 옌안으로 갔다. 그는 옌안에서 지식분자에 대한 정풍(整風)이 몰아쳤을 때 잠시 투옥되어 고초를 치렀지만, 공산당원으로서 그의 신념은 흔들림이 없었다.
1950년대 내내 리훙린은 중공중앙 정치연구실에서 복무했다. 대약진운동 당시 그는 후차오무(胡喬木, 1912-1992)의 명령에 따라 인민의 철강생산을 독려하는 글을 썼다. 후차오무는 1941년부터 1966년까지 마오쩌둥의 비서로서 활약했던 인물인데, 1980년대 중공중앙에서 “마오쩌둥의 기치를 다시 들고” 개혁개방에 반대했던 강경 보수파였다. 리훙린은 그렇게 후차오무의 수하에서 공산당의 정책을 홍보하고 선전하는 일에 몰두했는데······.
1959년 대약진운동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당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사상적 전기가 찾아왔다. 후베이성 우한에서 장즈쉐이(張治水)라는 한 대학생이 마오쩌둥 앞으로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하는 3만 자의 서신을 써서 올린 사건이었다. 서신을 먼저 읽은 리훙린은 대기근의 참상을 당 중앙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우선 자신이 직접 편집하던 <<사상계 동태(動態)>>지에 그 서신의 축약본을 게재하고, 중공중앙에 그 서신의 원본을 발송했다.
바로 그때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앙의 영수들은 장시(江西)성 루산(廬山)에 모여서 마라톤 회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국방장관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가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하며 마오쩌둥의 실책을 비판했다. 이에 격분한 마오쩌둥은 작심하고 펑더화이와 그의 직속 부하들을 반동집단으로 몰고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장즈쉐이의 서신을 받아 읽은 마오의 측근 천보다(陳伯達, 1904-1989)는 베이징에 전화를 걸어서 인쇄된 간행물을 모두 파기하라 지시했다. 이후 서신을 써서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한 장즈쉐이와 리훙린은 모두 당을 공격한 “소(小)펑더화이”로 낙인 찍히고 박해를 받았다. 리훙린이 맡아온 <<사상계 동태>>는 정간(停刊)당했고, 리훙린은 농촌에 하방되어 “노동 단련”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당은 리훙린에게 우경(右傾) 사상을 교정하라며 하방시켰지만, 농촌의 참혹한 현실을 몸소 체험한 그의 사상은 더욱 오른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의 질곡서 해방되지 않고선 진흙탕서 벗어나 현대화의 큰길로 갈 수 없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중국 지식계에서는 개혁파의 영수 후야오방(胡耀邦)이 이끄는 사상해방 운동이 전개되었다. 후야오방은 당시 사상해방운동에서 일군의 맹장들이 출현했다고 말했다. 리훙린은 분명 자유화의 맹장이었다. 그가 쓴 글들이 잇달아 지식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리훙린은 “신(新) 계몽시대”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1978년 초 리훙린은 문혁 시절의 집단 폭력과 개인숭배의 광열을 비판하는 “과학과 미신”을 발표했다. 훗날 그는 “마오쩌둥의 질곡에서 해방되지 않고선 중국이 진흙탕에서 벗어나 현대화의 큰길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작심하고 이 글을 썼다고 회고했다.
이어서 1979년 1월 리훙린은 “영수(領袖)와 인민”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1) 영수가 인민에 충성을 바쳐야 하고, 2) 오직 인민이 역사를 창조하며, 3) 영수는 하늘이 낸 인물이 아니라 실천 중에 성장한 일개 인간일 뿐이며, 4) 인민은 영수를 비판할 수 있고, 5) 영수는 1인이 아니라 다수의 지도자를 의미하고, 6) 종신제와 후계자 제도는 폐지되어야 하며, 7) 개인숭배는 용납될 수 없다는 일곱 가지 주장을 펼쳤다.
덩샤오핑이 민주장 운동을 탄압한 직후인 1979년 4월 리훙린은 <<독서(讀書)>>지를 창간했다. 창간호의 권두에 “독서엔 금구(禁區, 금지된 구역)가 없다!”는 그의 시론이 실렸다. 독서에 금구가 없기 위해선, 모든 책이 다 출판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책이 다 출판될 수 있기 위해선,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표할 수 있어야만 한다. “책을 읽을 권리”를 내세워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이 글은 새로운 시대에 맞게 “국가의 철학”을 개조하라는 실로 강력한 요구였다.
1979년 3월 30일, 덩샤오핑은 막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한 후 사회주의 4항 기본원칙을 발표했다. 4항 기본원칙이란, 1) 사회주의 노선 견지, 2) 무산계급 독재 견지, 3) 공산당의 영도력 견지, 4)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견지를 의미했다. 경제개발을 위해 개혁개방 노선을 추구하지만, “국가의 철학”은 절대로 바꾸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 당시는 누구도 입을 열어 덩샤오핑을 비판할 수 없는 엄혹한 시국이었다. 바로 그때 리훙린이 덩샤오핑에 직격탄을 날렸다. 1979년 5월 19일 인민일보에는 리훙린의 시론 “대체 어떤 사회주의를 견지하나?”가 게재되자 중국 지식계에 일대의 환호성이 터졌다. 크게 고무받은 리훙린은 나머지 3개 기본원칙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마침내 완성된 리훙린의 “4대 기본 원칙” 비판은 중국 지식계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인민해방군 투입한 톈안먼 대학살로 사상투쟁 종식...리훙린 책은 지금도 금서
1999년 자유의 해방구 홍콩에서 리훙린의 <<중국사상운동사 1949-1989>>가 출판됐다. 톈안먼 대학살이 발발하고 꼭 10년 되던 해였다. 지금도 중국의 금서 목록에 올라 있는 이 책에서 리훙린은 1949년 건국부터 1989년 톈안먼 대학살까지 40년의 역사를 중국공산당이 일으키고 이끈 “사상투쟁”의 역사로 정리한다. 여기서 사상투쟁이란 중국공산당의 지시 아래 다수 인민이 소수의 적인(敵人, 인민의 적)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군중 폭력에 의한 정치운동을 의미한다.
마오쩌둥이 지배하던 27년의 세월 중국의 전 인민은 틈만 나면 정치 집회에 나가서 구호를 외치며 “인민의 적”을 향한 분노와 적의를 표출해야만 했다. 끝도 없는 사상투쟁의 연속이었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개혁개방 시대가 열렸지만, 1980년대 중국공산당은 끊임없이 사상투쟁을 이어갔다.
그 중 “정신 오염 청소” 운동(1983-1984)과 “자산계급 자유화 반대” 운동(1986-1992)이 대표적이었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중공중앙의 사상투쟁은 자유화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개혁 세력의 저항에 부딪혔고, 급기야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낳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리훙린은 중국공산당이 톈안먼 대학살을 감행함으로써 40년 동안 지속됐던 강압적인 사상투쟁을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종식했다고 질타한다.
“최후에는 ‘무기의 비판’이 ‘비판의 무기’를 대체했다. 인민 해방군의 탱크와 총기는 물론 자유화의 붓대보다 강력했다. 6.4 대학살 이후 인민 해방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자유화의 전군(全軍)은 몰락했다. 자유화 운동 세력이 일망타진되었기에 ‘반(反)자유화 투쟁’의 대상도 사라졌다. 비판 대상이 없어졌기에 더는 군중을 동원한 사상투쟁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1844년 26세의 청년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비판의 무기가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고 썼다. 이 구절은 사회주의 혁명가 사이에서 무기를 들고 투쟁하라는 정치 구호로 활용되었다. “무기의 비판”이란 이론투쟁이 아니라 무장투쟁을 의미한다. 민초가 막강한 관군에 저항하는 상황에서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1989년 톈안먼의 시위 군중은 “비판의 무기”만을 휘둘렀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인민 해방군을 “비판”하지 않았다. 시민의 정당한 비판 앞에서 논리가 막혀버린 중국공산당은 “무기”를 들고 시위 군중을 제압했다. 다음 주 토요일(2022년 6월 4일)은 톈안먼에서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33주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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