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도, 메뉴판도, 표지판도 '외국어'.. 불법이지만 처벌은 어려워

이학준 기자 2022. 5. 2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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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압구정로데오 거리 간판 10개 중 7개는 '외국어 간판'
메뉴판·표지판에서도 한글 '실종'
법 시행령 위반 사례 수두룩한데.. 정부 "처벌 어려워"
지난 2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데오 거리 한 건물 전체가 영어간판으로 되어 있다. /윤예원 기자

직장인 이모(28)씨는 최근 서울 마포구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일본식 선술집을 예약했다. 이씨는 예약시간보다 약 10분 일찍 근처에 도착했으나 음식점을 찾을 수 없어 진땀을 뺐다. 음식점 간판이 일본어인 ‘히라가나(일본의 표음문자)’로 표기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씨는 “인터넷으로 예약했을 때는 음식점 이름이 한글로 돼 있었는데, 실제 와보니 간판이 일본어로만 쓰여 있어 예약했던 음식점인 줄 몰랐었다”며 “가게에 전화를 해서 찾았다”고 했다.

이씨가 방문했던 가게의 간판은 불법이다. 옥외물광고법 시행령상 간판 등 옥외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로 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외국 문자로 표시할 경우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한글과 병기(倂記)해야 한다. 한글을 적고 그 옆에 외국어를 써야 하는 것이다.

실제 법원은 2004년 국민은행(KB)과 케이티(KT)가 상호와 기업이미지통합(CI)을 영문으로 변경한 사건과 관련해 “외국 문자로 기재하는 경우 한글을 병기해야 한다는 옥외광고물법 시행령을 위반했다”고 판시한 바 있다. 특히 한글과 외국어를 병기하더라도 한글이 인식될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은 경우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외국어를 큼지막하게 쓰고 한글은 알아볼 수 없게 작게 기재한 것도 불법이라는 의미다.

2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데오거리 한 건물 1,2층에 위치한 가게 간판이 한글 병기 없이 영어와 일본어로만 이뤄져 있다. /윤예원 기자

일본어 간판보다 친숙한 ‘영어 간판’의 경우 상황이 더 심각하다. 27일 젊은 세대들이 많이 찾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데오 거리를 가보니 한글 간판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가게 10곳 중 7곳은 한글 병기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3층 건물 전체가 영어 간판으로만 이뤄진 곳도 있었다. 1층에는 영어 간판, 2층에는 일본어 간판이 있는 건물도 눈에 띄었다.

2019년 한글문화연대가 12개 자치구 7252개 간판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글표기 실태에 따르면 외국어 간판은 1704개로 23.5%를 차지했다. 외국어와 한글을 병기한 간판은 1102개(15.2%)였다.

상황이 이렇지만 외국어 간판에 대한 관리나 제재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건물 4층 이하에 설치되는 크기 5제곱미터(㎡) 이하 간판들은 허가·신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지자체 차원에서 계도를 할 수 있겠지만, 이행 명령이나 실질적인 행정 절차는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건물 5층 이상에 크기 5제곱미터(㎡)가 넘는 간판이 외국어로만 표기돼 있는 경우 최대 징역 1년 이하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지만, 실제 처벌을 받는 사례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지자체에서 고발을 하면 수사를 거쳐 기소가 될 수 있다”면서도 “위반 행위 정도가 벌칙에 이를 정도로 심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2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데오 거리에 위치한 한 카페 메뉴판 전체가 영어로 돼있다. 이 중 M.S.G.R은 미숫가루를 의미한다./윤예원 기자

간판뿐만 아니라 메뉴판이나 표지판도 한글을 적지 않고 영어만 사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최근 소셜미디어(SNS)에서는 한 카페가 메뉴판에 미숫가루를 ‘MSGR’이라고 기재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에스프레소 콘파냐(Cafe Con Panna)는 한글로 ‘콘파냐’라고 적고 미숫가루는 영어로 적어야 하냐는 조롱까지 나왔다.

외국어가 한글을 밀어내면서 이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일상에서 소외되고 있다. 노년층을 대상으로 야간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조모(31)씨는 “어르신들은 영어 메뉴판을 보면 뭐가 뭔지 하나도 알지 못한다”며 “영어를 모른다고 말하면 창피하니 남들이 시키는 걸 따라 시키거나 종업원에게 ‘뭐가 제일 맛있냐’고 물어봐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어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어려운 분들에게 길을 알려줄 때는 ‘뚜레쥬르’나 ‘스타벅스’ 등 주변 건물을 기준으로 설명을 해야 하는데, 영어를 읽기 힘들어하는 어르신들은 이마저도 찾지 못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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