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인문정원] 우리는 디스토피아에서 산다

입력 2022. 5. 27. 22:4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냥꾼과 사냥감만 있는 세상
우리는 사냥을 멈출 수 있을까

28세 청년이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한 뒤 자살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이 뉴스는 많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김민수 검사’를 사칭한 자가 청년을 불법대출 사기에 연루되었다고 속여 대포통장을 개설한 뒤 돈을 빼 갔다. 사기를 당한 청년은 마주친 실존의 불확실성에 얼마나 진절머리를 쳤을까. 이 야만의 세상에 나는 슬픔과 분노를 멈출 수가 없다.

인류는 오랫동안 이상향을 꿈꾼다. 당신도 알다시피 서양엔 유토피아(Utopia)가 있고 동아시아엔 무릉도원이 있다. 유토피아란 본디 그리스어의 ‘아니다’(ou)와 ‘장소’(topos)를 합성한 단어로 ‘아무 데도 없는’(nowhere) 장소라는 뜻이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유토피아의 역상(逆像)이다. 우리가 질주하는 저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디스토피아다. 나는 해열제를 사러 약국을 가는 당신을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나를 모르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구화 시대의 가느다란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
장석주 시인
여기 토끼를 쫓는 사냥꾼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사냥꾼은 토끼를 포획해서 임금과 수당을 받는다. 숲속엔 토끼를 쫓는 사냥꾼들로 가득 차 있다. 사냥꾼이 훑고 지나간 숲에는 토끼들이 고갈되어 사라진다. 사냥꾼들은 토끼를 찾아 다른 숲으로 이동한다. 아무도 사냥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 사냥꾼을 그만두는 즉시 사냥감이 되기 때문이다. 약한 자를 희생양 삼는 악마들, 소액투자자를 제물로 삼는 헤지펀드, 사망보험금을 타 내려고 ‘설계된 죽음’으로 내모는 파렴치한 자들, 이들이 바로 사냥꾼들이다.

전 세계 부의 90%를 세계 인구의 1%가 소유한다. 그 나머지 10%의 부를 99%가 나눈다. 당신과 나는 99%의 인류에 속할 것이다. 탐욕과 이기주의로 들끓는 세계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다. 사냥꾼의 유토피아만이 유일하다. 이것은 자본시장에서의 승자만이 누리는 유토피아다. 이들은 쉬지 말고 성과를 내라고, 항상 포획물로 자루를 채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들은 사냥에 내몰려 자주 번아웃을 겪는다. 사냥꾼의 안전과 행복을 약속하지도 못하고, 불확실성의 공포를 품은 사냥꾼의 유토피아란 지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사냥꾼의 사회’라고 규정한다. 우리는 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결과로 파시즘, 광신주의, 인종주의, 테러리즘 따위로 소동을 빚는 세계를 마주한 채 죽이거나 죽거나 하는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도록 강요당한다. “이제 우리 모두는 사냥꾼이다. 또는 사냥꾼이 되라는 말을 들으며, 사냥꾼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받거나 강요당한다.”(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160쪽) 당신은 어느 쪽인가? 사냥꾼인가, 아니면 사냥감인가? 난민, 노숙자, 이주노동자들은 세상에 널린 가장 취약한 사냥감이다. 이들은 사냥꾼과 몰이꾼에게 쫓기다가 막다른 곳에 내몰려 누군가의 포획물이 되고 만다.

오늘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놀랐다. 당신은 유동하는 공포라는 올무에서 벗어나려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한다. 방금 해바라기 씨앗을 쪼고 물 몇 모금을 마신 앵무새도, 낮에 먼 곳으로 출장을 다녀온 열쇠공도, 정신병원에 수용된 이들도, 죽은 자들도 자기의 자리에서 잠들었다. 나는 이 세계의 고요를 깨고 싶지 않다. 바이러스 전염병이 창궐하고 기후재난으로 몸살을 앓는 이 세계! 죽거나 죽임을 당하는 지옥에서 각자도생의 길을 찾다가 이곳을 탈주하는 수단으로 자기 살해를 선택하는 청년들! 자식이 제 부모를 쳐 죽이는 사회, 성과를 내라고 자기 수탈을 장려하며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 괴물을 증오하면서 괴물을 닮는 사회, 서로에게 유동하는 공포인 사회가 바로 디스토피아 아닌가! 지옥은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다. 우리의 손에는 희생자들의 피가 묻어 있다. 우리는 사냥꾼이고 사냥감인 동시에 자본주의 제단에 바쳐지는 희생양이고 봉헌물이다. 당신과 나는 어쩌다 디스토피아를 만들었을까? 나는 꿈속에서 사냥꾼을 그만두라는 속삭임을 듣는다. 과연 우리는 사냥꾼을 그만둘 수 있을까?

장석주 시인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