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객열전] '부드러운 리더십'의 표상 엄상필

정완주 기자 2022. 5. 2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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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의 고수' 계보를 PBA에서 꽃 피운다
프로당구 선수 엄상필이 24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메이저당구클럽에서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엄상필(45.블루원엔젤스) 선수는 팀 주장을 맡고 있다. '엄상궁'이 그의 별명이다. SBS 사극 '여인천하'에서 고(故) 한영숙씨가 맡은 역할이 문정왕후(전인화 분)의 심복인 '엄상궁'이었다. 상황에 발빠르게 대처하는 임기응변과 근엄한 목소리로 당시 뜨거운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궂은 일을 도맡아 팀을 이끄는 엄상필 특유의 부드러운 리더십을 본 팬들이 그의 '엄씨' 성과 연계해 엄상궁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지난해 팀리그 시즌 꼴찌였던 블루원엔젤스는 올 시즌 승승장구로 치고 올라와 플레이오프를 통해 결승까지 올라가는 기적의 반전 드라마를 펼쳤다. 파이널리그도 6차전까지 가는 박진감 넘치는 명승부 끝에 준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그는 팀리그 경기에 나설 때마다 거의 승리를 거두는 필승 카드였다. 엄상필의 올 시즌 팀리그 성적은 19승 3패. 당분간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 팬들은 주장 엄상필의 활약을 지켜본 후 엄상궁에서 '엄중전', '엄황제'로 승격을 해주는 재치로 보답했다.  

프로당구 선수 엄상필이 24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메이저당구클럽에서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아마추어 동호인에게 기본을 배우는 프로 선수의 겸손함

엄상필은 PBA 선수 중에서도 강자의 반열에 든 선수다. 선수 등록 전에는 '재야의 고수'로 이름을 날렸다. 전국의 당구 고수들이 모인 서울 강남 일대의 당구장을 섭렵하면서 '최재동(PBA)-이충복(시흥시체육회)-엄상필'로 이어지는 계보를 구축하기도 했다.

당구에서 나름대로 일가를 이룬 엄상필은 올해 들어 새로운 결심을 다졌다. 팀리그 성적을 바닥에서 끌어올리는 성과를 낸 만큼 개인 성적도 상위권 진입을 노리고 있다. 

"팀 주장을 맡은 책임감을 위해서라도 개인 성적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해 시즌에는 6차례 개인전 대회에서 무려 3차례나 1차 예선에서 탈락하는 아픔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블루원엔젤스 주장에 걸맞은 개인 성적을 올려야겠다는 목표를 다짐한 거죠."

그래서 엄상필은 몇 개월 전부터 3쿠션의 기본 중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파이브 앤드 하프시스템'을 배우고 있다. 놀랍게도 그는 3쿠션에 입문하는 아마추어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이 시스템을 습득하지 않았다. 파이브 핸드 하프는 뱅크샷은 물론 뒤돌려치기, 옆돌리기 등  기본 배치에 적용되는 범용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스템이다. 더 놀라운 점은 파이브 앤드 하프시스템을 아마추어 동호인 후배한테 배우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전까지는 뱅크샷도 저만의 감각으로 처리했습니다. 시스템을 배우지 않았으니 적용할 시스템도 없었던 거죠. 어떤 시합에서는 컨디션이 좋지 않을 경우 큰 오차로 공략이 실패할 때도 있었어요. 그래서 좀 더 높은 실력을 쌓기 위해서는 시스템 공부가 필요하다고 자각한 겁니다. 그런데 다른 선수들한테 도움을 받아서 적용을 해봤지만 기준점이 애매한 겁니다. 그러던 중 잘 아는 동호인 후배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파이브 앤드 하프시스템을 적용해보니 저하고 딱 맞아떨어져요. 그래서 그 후배한테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겁니다. 명색이 프로 선수인데 어떻게 하점자인 아마추어한테 배우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요. 모르는 점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점자한테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그는 3쿠션 기본서적 중에서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 있으면 발췌해서 연습에 활용하고 있다. 유명한 프로 당구선수라는 자존심보다는 본인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으로 입문자가 적용하는 방식을 마다하지 않는 열린 사고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프로당구 선수 엄상필이 24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메이저당구클럽에서 진행된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후배 선수를 롤모델로 삼는 열린 사고

엄상필의 개방적 사고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가 롤모델로 꼽은 선수도 후배인 서현민(웰컴저축은행) 선수다. 대부분의 당구선수들이 세계적인 유명 선수나 선배 등을 롤모델로 삼는 경우와는 다르다. 엄상필이 서현민을 롤모델로 삼는 이유는 두 가지다. 서현민의 '성실함'과 '인성'을 본받기 위해서다.

"사실 저는 연맹 선수로 지낼 때 목표나 욕심이 없었어요. 국내 최정상급 선수가 당구장의 쪽방을 얻어 숙식하는 모습을 보고 무슨 꿈을 키웠겠어요. 그만큼 당구계의 사정이 열악했으니 선수로서 뭔가 이루겠다는 목표 의식 자체가 없었고 그러다보니 게을러진 거죠. 그런데 서현민은 저한테 부족한 성실함의 대명사일 만큼 굉장히 노력하는 선수예요. 그리고 인성도 뛰어나죠. 당구계 누구한테 평판을 물어봐도 서현민을 욕하는 사람이 없어요. 서현민에게 어떤 선수를 평가해 달라고 하면 절대로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그 선수에게 실례나 부담이 될까 봐 언행을 조심하는 거죠. 그래서 비록 후배이지만 제 롤모델이 된 겁니다."

엄상필은 20대 중반부터 당구장을 운영해 생계를 꾸렸다. 당구 선수가 된 것도 당구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택한 길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스스로 자신의 약점을 목표 의식의 부재라고 꼽는다.

그는 군대를 마친 후 경기도 성남에서 25살 무렵 처음으로 당구장을 인수해 직접 경영 전선에 뛰어들었다. 2년 정도 운영하다가 잠시 쉬고 있던 그는 1년 후 망해 가던 당구장을 다시 인수했다. 하지만 당구장 운영이 점점 어려워졌다. 나중에는 당구장 경영보다는 강남 일대의 고수들이 모인 당구장 원정에 푹 빠져 지냈다.

"원래 서른이 되기 전에 당구장을 접겠다고 내심 마음을 먹었는데 실제로 실행에 옮겼죠. 그리고 당구계의 최정상급 고수들이 모인 강남의 당구장으로 매일 게임을 하러 갔습니다. 고(故) 김경률 선수와 이충복 선수 등과 그때 인연을 맺었죠. 이충복 선수와는 그때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지냅니다."

엄상필은 처음 강남 일대 당구장을 다닐 때 정상급 고수들과는 실력 격차가 존재했다. 그러나 2년 정도 부대끼면서 당구에 몰두하자 어느새 그의 실력은 정상권에 올라섰다. '성남에 가면 엄상필은 피해 다녀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당시 최고수들도 실력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그는 2년 만에 그들과 대등한 실력을 쌓아 올린 것이다.

"막상 재야의 고수라는 소리를 듣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점점 기피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게임을 해도 제가 이길 확률이 높으니 치는 사람들이 재미가 없어진 탓이죠. 그래서 재미로 시작했던 당구 원정도 그만 두고 30대 중반에 경기도 수지에서 당구장을 아예 차려 버렸습니다. 당시 대대 6대, 중대 3대 규모였는데 입소문이 날 정도로 당구장이 잘 되는 편이었어요."

프로당구 선수 엄상필이 24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메이저당구클럽에서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목표 의식이 없던 선수 생활...PBA 출범이 동기 부여

그의 인생 전환점은 PBA 출범이었다. 당구와 관련된 목표가 생긴 것이다. 엄상필은 제법 장사가 잘 되고 있던 당구장도 과감하게 접었다. 프로선수로 적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테이블 상황을 경험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어서다. 그래서 여러 당구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프로 선수면 돈을 받고 손님들과 게임을 칠 수 있지만 저는 얽매이는 게 싫어서 가고 싶은 당구장을 정해서 갔어요. 다양한 테이블을 경험하면 실제 경기에서도 몇 개의 유형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죠. 그러면 눈으로 배치를 보고 머리에서 당구대의 특성에 따라 팔 동작을 시키는 과정이 물 흐르듯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테이블 경험이 미숙하면 머리에서부터 혼란이 와 부자연스러운 스트로크가 나오죠. 일종의 버퍼링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엄상필은 어릴 때부터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었다. 축구선수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형과 함께 축구공, 농구공을 들고 2시간씩 운동을 했다. 초등학교 때 배운 탁구는 선수출신이 아닌 상대라면 웬만해서 지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는 당구장을 들락거리면서 당구를 접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또래 중에서 당구를 꽤 잘 친다는 소리를 들었다. 

좋아하는 당구를 치면서 대학 진학을 도모하기 위해 엄상필의 선택한 길은 취업반이었다. 당시 그가 다닌 고등학교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을 구분한 '우열반' 제도를 운영했다. 엄상필은 '우등반' 소속이었지만 과감하게 취업반으로 진로를 틀었다. 단지 야간자습 대신 당구를 치기 위한 것이었다.

"원래 취업반을 가서 1등을 하면 내신 1등급을 받았어요. 당시 대학 진학에 내신등급이 큰 비중을 차지했을 때여서 그점도 노렸죠. 실제로 1등까지 했는데 다른 문제가 생겨버렸어요. 우선 취업반으로 가면 충주에 소재한 직업전문학교로 내려가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걸 몰랐죠. 좋아하던 당구도 치지 못했어요. 정작 대학에 진학할 무렵 취업반에서 1등을 해도 내신이 14등급을 받도록 규정이 바뀌어서 결국 내신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습니다." 

프로당구 선수 엄상필이 24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메이저당구클럽에서 진행된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내 꿈은 소속팀인 블루원엔젤스의 감독 되는 것"

대학 진학 대신 선택한 당구의 길은 불혹을 훌쩍 넘은 지금 새로운 인생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엄상필의 꿈은 남다르다. 소속팀인 블루원엔젤스의 감독을 목표로 삼았다.

"구단주인 윤재연 부회장을 비롯해 블루원리조트 임직원 분들이 너무 세심하고 배려가 깊게 선수들을 보살펴 주는 바람에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윤 부회장께서는 다음 시즌에도 이전 멤버 그대로 가고 싶다고 선언해서 감동을 받았어요. 얼마 전 홍진표 선수가 1부 리그에 잔류하지 못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격미달로 팀원에서 제외됐는데 선수들 못지않게 안타까워하셨죠. 그래서 제 꿈도 블루원엔젤스의 감독이나 코치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가족과 같은 분위기의 구단이라면 '블루원 맨'으로 평생을 바칠 수 있다는 결심의 발로이죠." 

팀 주장을 맡으면서 '부드러운 리더십'을 보여준 '엄상궁' 엄상필. 그 리더십을 바탕으로 지금 몸담고 있는 소속팀의 감독이 된다면 또 다른 레전드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스포츠한국 정완주 기자 wjchung12@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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