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복잡한 세상..쉬운 그림책 찾는 어른
그림은 글자보다 쉽다. 한 실험에 따르면 이미지가 곁들여진 정보는 3일 후에도 65%가 남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만화로 된 소설인 ‘그래픽 노블’을 넘어 ‘그래픽 논픽션’, ‘그래픽 에세이’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책이 나오고 있다.
《푸틴의 러시아》(대릴 커닝엄 지음, 어크로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삶을 만화로 그렸다. 지난해 9월 영국에서 처음 출간된 뒤 “복잡한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냈다”고 호평받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덧붙인 서문에서 저자는 “누구도 푸틴을 막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벌어질 사태였다”며 “푸틴은 서구권 국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똑똑하고 계산적인 인물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그를 막아서지 못하게 한 거짓된 신화를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푸틴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깔보거나 무시하는 사람에겐 곧바로 달려들어 격렬하게 싸웠다. 어떤 비열한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복수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1년 앞둔 16세 때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KGB 본부를 찾아가 KGB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기도 했다.
책은 푸틴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벌인 일들을 조명한다. 그에게 비판적인 인물들이 독극물 중독, 차량 폭발 등으로 죽는 모습은 마피아나 조폭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2018년 솔즈베리 독살 시도 사건 등 최근 일어난 일들까지 꼼꼼하게 다룬다. 저자는 푸틴을 “암살단과 화학무기 실험실을 거느린 잔인한 KGB 마피아”라고 평가한다.
《엄마, 가라앉지 마》(나이젤 베인스 지음, 싱긋)는 치매에 걸린 엄마를 2년 동안 돌보며 경험한 슬픔과 고통, 버팀, 회복의 이야기를 전한다. 180쪽 남짓의 짧은 분량이지만 엄마의 생몰 연도인 1933년부터 2017년까지를 아우르는 이야기의 깊이는 결코 얕지 않다. “연도를 본다. 1933-2017. 저 대시. 저 짧은 대시. 저것이 인생이다. 모든 게 다 저 짧은 문장 부호 안에 들어 있다. 당신이 하고, 생각하고, 보고, 꿈꾸고, 울고 웃은 모든 것.”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공습으로 어린 오빠를 잃은 엄마의 아픈 기억, 1970년대 노동자 계층 이웃들과 나눈 공동체 의식, 1990년대 집안의 팔팔한 엔진이었던 영국 엄마의 모습은 6·25전쟁과 급속한 경제 발전을 겪으며 울고 웃었던 한국의 엄마들과도 닮았다.
책은 치매 환자를 둔 가족들의 모습을 생생히 그린다. 한 삶의 마지막 목격자이자 증인, 돌보미로서 꿋꿋함을 잃지 않아야 하지만 얼마 못 가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은 끝이 없고, 사랑하는 가족을 돌보고 있다는 기쁨과 보람보다 무력감과 슬픔, 중압감이 훨씬 크게 다가온다.
《라듐 걸스》(씨 지음, 이숲)는 프랑스 그림 작가의 책이다. 1917년부터 1926년까지 미국 뉴저지에서 일어난 여성 노동자들의 라듐 피폭 사건을 다룬다. 어두운 곳에서도 빛을 내는 라듐의 성질을 이용해 시계 야광판을 만들던 공장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라듐이 섞인 페인트를 칠하기 위해 입으로 붓끝을 뾰족하게 모으면서 작업했는데, 그 과정에서 다량의 라듐을 섭취했다. 재미로 손톱이나 치아, 얼굴에 라듐 페인트를 바르기도 했다.
이후 이들에게서 재생 불량성 빈혈과 골절, 턱 괴사 등이 나타났다. 1924년까지 70여 명 가운데 50명이 병에 걸렸고, 12명이 사망했다. 회사는 문제를 은폐하고 증거를 조작하려고 했다. 1925년 시작된 소송은 1939년 대법원이 ‘라듐 걸스’의 손을 들어준 뒤에야 끝났다. 이후 전 세계 사람들은 방사성 물질의 위험성을 알게 됐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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