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평행우주, 삶을 '스핀오프' 할 수 있다면[책과 삶]

이영경 기자 2022. 5. 2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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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일곱 조각
은모든 지음|문학과지성사|290쪽|1만4000원
소설가 은모든이 연작소설 <우주의 일곱 조각>을 펴냈다. 세 여성의 삶의 7가지 모습을 다룬 소설에 대해 은모든은 “삶의 다양한 스펙트럼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진학·취업·결혼·출산 등 굵직한 생애주기에 따른 선택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점심식사 메뉴를 정할 때나, 디저트 가게에서 먹을 케익을 고를 때, 카페에서 마실 음료를 고를 때에도 신중하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인생은 갈림길의 연속이라는 점,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리는 것은 인생에서 좀처럼 어렵다는 점을 ‘가보지 않은 길’에서 노래했다.

“노랗게 난 숲길에 두 갈래의 길이 있었네./ 그 두 갈래의 길 중에 하나를 택했고, /그 길이 내 인생의 모든 것들을 바꾸어놓았네.”

소설가 은모든의 연작소설집 <우주의 일곱 조각>은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았더라면 어떤 풍경이 있었을지를 가늠해보는 소설이다. 전혀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지, 아니면 비슷한 풍경을 만날지 우리는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우주의 일곱 조각>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평행우주’ ‘스핀오프’에 대해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평행우주는 같은 모습을 가지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수없이 많은 우주를 일컫는 말이다. 스핀오프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캐릭터나 설정에 기초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원작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렇게 말하면 <우주의 일곱 조각>이 마치 슈퍼 히어로가 나와 여러 우주를 누비는 SF 장르물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30대 세 여성의 삶이 7개의 다른 버전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이십대 후반 혹은 삼십대 초반부터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 끝났고, 더이상 인생에 변할 수 있는 요소가 없다고 느끼는 여성들을 많이 봤어요. ‘나’라는 개인이 가진 ‘성질’은 동일하지만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보면 삶의 폭이 더 커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소설가 은모든은 26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소설은 뜻밖에도 우에노 지즈코와 미나시타 기류의 대담집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의 한 구절에서 출발했다. “평행 우주가 100개 있다면 저는 그중 80개 세계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99개 세계에서는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겁니다.” 은모든은 “워킹맘으로 악전고투하는 여성이 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오롯이 담긴 이 말을 듣고 이 세계와는 다른 양상으로 살아갈 아흔아홉 갈래의 세계를 지어나가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한다.

소설은 30대 여성인 민주, 은하, 성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이기적인 오빠,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채 은하에게 의지하는 엄마. 역시 엄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은하는 음악과 빵을 좋아하는 평화로운 성격이지만 가족에서 비롯된 상처와 불안을 갖고 있다. 또한 누구에게도 특별한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다. 양성애자인 민주는 쌍둥이를 둔 직장인이었다가, 첫사랑 ‘민영 언니’의 파트너이기도 하다. 성지는 만년 조역 배우로, 주인공 여성 배우를 괴롭히는 캐릭터만 반복적으로 맡기도 하고, 다른 세계에서는 톱스타가 됐다가, 아이돌이 되기도 한다.

평범한 30대 세 여성의 삶, 7가지 다른 버전의 이야기로 펼쳐져||||성폭력,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등 젠더이슈도 다뤄 ||||삶의 무게는 여전하지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이야기||||



첫 이야기 ‘미래에서 왔습니다’는 아마도 가장 쉽고도 현실적인 선택으로 이뤄진 삶일 것이다. 성지는 만년 조연 배우이고, 민주는 쌍둥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느라 고된 하루가 반복되는 매일이 바로 ‘윤회’라고 느낀다. 은하는 무성애자이지만,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대신해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길 바라는 엄마를 위해 바람을 핀 전력이 있는 옛 애인과 결혼한다. 이들은 “살아갈 날이 훨씬 더 길건만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꿈을 논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듯하고, 갈수록 포기해버린 것들에 대해서 말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고, 발버둥 쳐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너무 이르게 ‘인생의 끝’을 예감하는 이들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도 있다는 듯, 소설은 여섯개 버전의 다른 삶을 펼친다. 한 번이라도 주연이 되고 싶은 성지는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타는 톱스타가 됐다가,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되기도 한다. 민주는 찌든 직장에서 벗어나 제주도에서 멋진 바를 차리기도 하고, 민영 언니와 파트너를 이루기도 한다. 은하는 가족에게 벗어나 독립해 인천으로 떠나고,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즐기며 디제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들을 둘러싼 사회구조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지는 어린 나이에 노출이 많은 거장의 영화에 출연했다가 톱스타가 되지만, 그 이미지에 갇힌 ‘여배우’의 삶이 지겨워 그만두고 싶어한다. 삼십대 여성 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엄마 역할 뿐이라거나, 노출이 많거나 몸에 쫙 붙여 숨쉬기도 힘든 옷을 입고 액션 영화에 출연해야 한다.

민주는 직장을 그만두고 제주도에서 바를 차리지만, 경제적 이유로 ‘n잡러’가 된다. 은하 역시 가족을 떠나 삼촌네에 가서 대학을 다니지만, 삼촌은 은하에게 은밀한 신체적 접촉을 시도한다. 현실의 중력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의 삶이 그렇다고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삶에서 성지는 스판덱스 슈트를 찢어버리는 새로운 여성 영웅 캐릭터로 유명해지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던 은하는 점점 ‘아니오’라고 하며 거절하는 삶을 연습하기 시작한다.

소설가 은모든 ⓒ강희갑



이야기 속에는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젠더이슈가 등장한다. 결혼에 대한 압박, 성폭력 등…. 은모든은 “여성 이슈를 다룬 이유는 이십대 후반 여성들이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다 끝난 것처럼 느끼는 현실의 벽이 성차별적 사회구조, 여성 이슈와 맞물려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 인물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는 중력처럼 벗어나기 힘들지만, 이들의 삶이 변주되며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경쾌하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노란 간판의 유명 디저트 가게, 방정식을 급히 휘갈겨 쓴 듯한 필체가 새겨진 티셔츠 등이 반복해 등장하며 재미를 준다.

은모든은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싶었다. 극한으로 가는 짜릿한 삶의 전복이 아니더라도, 차이를 감각하고 골라볼 수 있는 재미를 느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맛의 조각케이크를 골라먹듯이, 7개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맛과 재미를 보여주며 마침내는 “자기 목표를 향해 움직”이다가 “자기 연민에 휘둘리지 않는 차분하고 단단한” 존재가 된 세 여성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우주의 일곱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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