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이 도박이 된 세상, 대체 언제 아이를 낳으란 말이냐[책과 삶]

김지혜 기자 2022. 5. 2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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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얼마나 중요한가
메리 앤 메이슨·니컬러스 H. 울핑거·마크 굴든 지음 | 안희경 옮김 | 신하영 감수 | 시공사 | 380쪽 | 2만2000원
2021년 넷플릭스 시리즈 <더 체어>는 미국 가상의 아이비리그 대학 영문학과 학과장을 맡아 여성이자 유색인종, 싱글맘으로서 분투하는 한국계 미국인 김지윤(샌드라 오)의 이야기를 담았다. 넷플릭스 제공

능력주의는 구조적 차별을 모른 체한다. 지난 21일 한·미 정상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내각에서 여성이 배제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 직전 위치까지 여성이 많이 올라가지 못했다”고 답변했지만, 다음날 대통령실을 통해 구조적 성차별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해명을 냈다. “여성들이 공정한 기회를 가지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에 이어질 것은 해명이 아니라, 다음 질문이었다. 왜 많은 여성들이 ‘그 위치’까지 오를 수 없었던 것일까. 공정은 차별의 원인을 살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아이는 얼마나 중요한가>(원제 Do Babies Matter?)는 여성 박사학위자가 전체의 50%를 넘기고도, 정년을 보장받거나 정년트랙 교수직에 속한 여성은 전체의 3분의 1에 그친다는 미국 학계의 문제적 현실에서 출발한다.

혹자들은 연로한 교수들이 은퇴하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2001년 캘리포니아대(UC) 버클리 캠퍼스의 첫 여성 대학원 학장을 맡은 메리 앤 메이슨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대학에는 구조적 성차별이 도사리고 있고, 이를 단순히 ‘차별’이라 칭하기만 한다면 문제 해결은 요원할 뿐이라는 것이다.

메이슨 교수는 버클리 캠퍼스의 수석연구분석가 마틴 굴드, 유타대 소속의 니컬러스 H 울핑거와 함께 정년트랙 교수직 여성이 적은 이유에 대한 ‘확실한 답’을 찾아나섰다. 책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문제의 원인은 바로 결혼과 출산으로 대표되는 ‘가족 구성’이었다.

박사후연구원 진입, 정년트랙 입성, 정년보장 심사…
단계마다 ‘성공이냐 가정이냐’ 기로에 서는 여성 연구자
학계를 떠나거나, 비정규직이 되거나, 일자리를 잃어야 하는 현실

쉽게 내린 답이 아니다. 2001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수행된 이 연구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16만명 이상의 직장생활을 만 76세까지 추적해 격년으로 발표하는 박사학위 소지자 조사 결과(SDR·미국 국립과학재단 발행), 10개 캠퍼스로 구성된 UC 시스템에 소속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등 양적 자료뿐만 아니라 개별 인터뷰와 온라인 토론 내용 같은 질적 자료까지 대규모 데이터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저자들은 “학계의 최상층에는 남성에 비해 여성의 수가 훨씬 적고, 이 자리에 오른 여성들은 동료 남성들처럼 결혼했거나 자녀가 있을 가능성이 훨씬 낮”으며 “자녀를 둔 여성들은 학계의 ‘2군인’ 비전임 교원이 되거나 대학 현장을 아예 떠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다수의 여성들이 정년트랙 교수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지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아이를 낳고 길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이 책의 가치는 이처럼 딱 떨어지는 결론 자체에 있지는 않다. 방대한 데이터와 정교한 분석을 통해 여성 연구자의 커리어 단계마다 찾아오는 차별적 현실을 구체적으로 밝혔다는 데 의의가 있다.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 시절부터 연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모성’은, 이후 정년트랙 교수직으로의 진입, 그 이후의 경쟁과 승진에서도 여성의 커리어를 발목 잡는 결정적 요인으로 드러난다.

2009년 UC 박사후연구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재직 중 자녀를 낳은 여성의 41%, 남성의 20%가 연구중심대학에서 교수직을 구할 계획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시공사 제공

“도대체 언제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여성 연구자들이 자주 나누는 질문이다. 출산과 육아는 커리어 진입 단계인 대학원생·박사후연구원 시절부터 고민거리다. 여성 연구자에게 출산은 진로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2009년 UC 박사후연구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재직 중 자녀를 낳은 여성의 41%, 남성의 20%가 연구중심대학에서 교수직을 구할 계획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남성의 경우 자녀 유무 및 계획과 상관없이 커리어 목표를 바꿀 확률이 비슷했지만, 여성은 자녀 출산 여부에 따라 교수직을 포기하는 확률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원인은 편견이다. 실제 남성 연구자들이 여성 연구자들보다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가정생활을 하면서 전문가로 성공할 수 없다는 편견”은 오직 여성에게만 지워진다.

이 편견은 “엄마트랙”(자녀 양육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승진과 급여 인상을 포기하는 여성을 위한 직업 경로 혹은 행동 양식)이라는 명칭으로 공공연하게 통용되며, 그 효과는 고용률이라는 숫자로 명확하게 나타난다.

엄마 연구자 41%가 교수직 구직을 포기하게 만드는 ‘구조적 차별’
자녀 없는 여성박사학위자보다 노동인구 이탈 가능성 4배
10여년간 방대한 데이터와 정교한 분석으로 구체적 수치 제시

책은 “SDR 결과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모든 분야에서 정년트랙 조교수직을 얻을 가능성이 7% 정도 낮았다”면서 “전반적인 성별 간 격차는 더 큰 차이를 숨긴다”고 강조한다. 6세 미만 자녀를 둔 여성은 자녀가 없는 여성에 비해 정년트랙 교수직을 구할 확률이 21%, 자녀가 있는 비슷한 상황의 남성보다는 16% 낮다. 심지어 이공계열에서는 자녀를 둔 기혼 여성이 같은 상황의 남성보다 33%나 낮다.

그렇게 엄마 연구자들은 결국 정규트랙을 포기하고 학계를 떠나거나, 비정규직 교원이 되거나, 아예 일자리를 잃는 수렁에 빠진다. 실제로 6세 미만 자녀를 둔 여성 박사학위자는 자녀가 없는 여성 박사학위자에 비해 노동인구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4배나 높다.

이 수렁을 운 좋게 피했거나, 아이를 취학연령까지 키운 후 재취업을 통해 빠져나온 여성들에게는 ‘정년 보장’이라는 또 다른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 국내 대학과 달리 미국 대학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정년트랙 교수들의 정년 보장을 결정하는데 이 과정에서도 가족 구성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물론 여성에 한해서다. “6세 미만의 아이를 둔 여성 과학자는 남성 동료보다 정년을 받을 비율이 27% 낮은데, 아이가 없는 여성은 정년을 받을 가능성이 남성보다 11% 낮았다.”

2002~2003년 UC 일·가정 설문조사에 따르면, 유자녀 여성 교수는 평균적으로 주당 53시간 연구에 시간을 쏟는데, 이는 무자녀 여성 교수, 유자녀 남성 교수, 무자녀 남성 교수를 통틀어 가장 적은 시간이다. 사실상 유자녀 여성 교수들은 가사와 돌봄 시간까지 포함해 주당 93시간을 노동에 투여하고 있는데도, 학교에서는 연구에 대한 이들의 열정이 부족하다며 폄하하기 일쑤다. 시공사 제공

박사후연구원 진입, 정년트랙 입성, 정년 보장 결정 등 커리어의 매 순간 여성 연구자는 성공과 가정,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는 기로에 지속적으로 내몰린다. 같은 조건으로 임용돼 오직 연구 성과에 의한 경쟁을 벌일 때도 유자녀 여성에게는 불리한 상황만 펼쳐진다.

2002~2003년 UC 일·가정 설문조사에 따르면, 유자녀 여성 교수는 평균적으로 주당 53시간 연구에 시간을 쏟는데, 이는 무자녀 여성 교수, 유자녀 남성 교수, 무자녀 남성 교수를 통틀어 가장 적은 시간이다. 사실상 유자녀 여성 교수들은 가사와 돌봄 시간까지 포함해 주당 93시간을 노동에 투여하고 있는데도, 학교에서는 연구에 대한 이들의 열정이 부족하다며 폄하하기 일쑤다. 이러한 불평등은 임금 격차에 영향을 미친다. 책은 자녀 1명당 여성 교수의 임금이 1%씩 줄어든다는 조사 결과 등을 인용해 대부분의 여성 교수가 남성 교수의 임금을 따라잡을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제시한다.

상아탑의 여성들은 그렇게 고립된다. ‘여성에 한해’ 일·가정 양립이 불가능에 가까운 무거운 현실 앞에서, 결혼과 출산은 더 이상 여성에게 삶의 ‘선택’이 아니게 된다. 성공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거나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뛰어드는 ‘도박’. 남성 연구자들이 평범하게 가정을 만드는 꿈을 꾸는 사이, 여성 연구자들은 비장한 각오로 가정을 만들거나 포기할 준비를 해야 한다.

책은 문제 진단에만 그치지 않는다. 당시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UC를 중심으로 수립하고 실천한 가족친화적인 정책들을 소개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2006년 UC에 도입된 ‘시간제 정년트랙 교수직’이다. 전일제 정규트랙 교원들에게 시간제 근무를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이 제도는 어린 자녀뿐만 아니라 연로한 부모를 돌봐야 하는 남녀 교원 모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 유자녀 여성 연구자에게 불리한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결과적으로 모든 구성원의 편익을 증진시키는 효과를 낳은 것이다.

미국에서 2013년 출간된 책이지만, 읽기에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책의 감수를 맡은 신하영 세명대 교수는 이 책이 “한국 사회에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로 2020년 기준 국공립대와 사립대의 여성 전임 교원 비율이 각각 18.3%, 27.2%에 지나지 않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제시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20년 전 미국의 상황에서 출발하는 이 책의 문제 분석과 해결책들은, 작금의 국내 학계뿐만 아니라 성차별과 이로 인한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조차 제대로 짚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 각계에 유용한 참고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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