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작은 글자 비춰낸 유리알.. 지식·학문의 세계 넓혔다
■ 거의 모든 안경의 역사 | 트래비스 엘버러 지음 | 장상미 옮김 | 유유
13세기 후반 유럽에서 첫 발명
얼굴에 고정 안 돼 상용 어려움
200년뒤 피렌체 부유가문 의해
오목렌즈 활용 근시용으로 제작
15세기 인쇄술 발명과 맞물려
지식 확산의 도구로 자리매김
안경의 시작은 ‘눈앞에 갖다 대는 유리 조각’이었다. 약 2000년 전 로마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세네카는 “물을 가득 채운 구체(球體)를 이용하면 작은 글씨도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썼다. 당시 사람들은 글을 읽을 때뿐 아니라 시력 보호를 위해 녹색 돌로 반지를 만들어 틈틈이 들여다보기도 했다. 수분을 함유한 투명한 초록물체가 눈의 피로를 덜어준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거의 모든 안경의 역사’는 눈앞의 유리 조각이 테와 다리를 달고 얼굴에 ‘안착’한 기나긴 역사를 훑는다. 저자는 안경사도, 안과의사도 아니지만 역사·철학·과학·예술을 아우르는 ‘지식 안내자’이자 ‘안경 덕후’로서 유리알에 얽힌 흥미진진한 미시사를 펼쳐낸다.
오늘날과 유사한 안경은 13세기 후반 유럽에서 ‘발명’됐다. 움베르토 에코가 수도원 살인 사건을 그린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묘사했듯 최초의 안경은 노안(老眼)을 교정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형태 역시 동물 뼈나 목재로 만든 길쭉한 틀에 렌즈를 끼워 연결한 것에 불과했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나 얼굴에 고정이 안 된 탓에 돌아다니며 멀리 떨어진 물건을 보거나 사냥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안경 제작자들이 ‘젊은 근시’에게도 안경을 씌울 생각을 한 건 약 200년 뒤였다. 근시용 안경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처음 탄생했는데, 저자는 도시 유력가문인 메디치가(家)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메디치는 은행업과 상업을 통해 축적한 재산을 시각 예술과 과학에 투자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가문이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1513년 교황이 된 레오 10세를 비롯해 메디치가 후손의 상당수가 근시로 고생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레오 10세가 오목렌즈로 시력 한계를 극복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근시용 안경 제작자는 피렌체에서 가장 힘 있고 부유한 가문의 후원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인쇄술 발명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와 안경의 연결 고리도 흥미롭다. 구텐베르크는 15세기 독일 아헨의 한 성당에서 사망한 황제의 유물을 공개하는 행사가 열릴 때마다 순례자들에게 볼록 거울을 장착한 배지를 팔았다. 순례자들은 ‘유사 안경’과 다름없는 배지를 쥐고 꽉 들어찬 군중 속에서도 멀리 떨어진 유물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는 1439년 흑사병으로 순례 행사가 미뤄지자 ‘거울’에서 ‘활자’로 사업 방향을 틀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인쇄술이 탄생했다. 적은 비용으로 문서를 대량생산할 수 있게 한 기술은 ‘식자층’과 ‘안경 착용자’가 동시에 급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폴더형 코안경, 가죽끈을 두른 안경 등 다양한 형태로 변모한 안경은 1700년대에 이르러 마침내 흔들림 없이 착용할 수 있게 됐다. 귀와 닿는 테 가장자리에 ‘ㄱ’자 다리를 다는 방식이 고안된 덕분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안경에 대한 이미지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안경잡이’는 신체적 결함을 지닌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탓이다. 레오 10세조차 많은 이가 지켜보는 직무 수행 중엔 안경 사용을 꺼렸고, 궁중 무도회를 즐기는 귀족들도 ‘고정형 안경’ 대신 렌즈를 손잡이에 부착한 ‘외알 안경’으로 멋을 냈다. 이런 분위기는 현대에 와서 ‘할리우드 스타’와 ‘선글라스’가 등장하며 급변했다. 세계 최초의 안경잡이 배우인 해럴드 로이드는 둥근 뿔테 안경으로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또 20세기 초 나온 선글라스는 ‘화려한 부유층과 유명인의 소유물’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안경에 찍힌 낙인을 지워냈다. 뒤이어 의류뿐 아니라 안경에도 최신 유행 스타일을 접목하는 트렌드가 자리 잡으며 안경은 패션을 완성하는 필수 아이템이 됐다.
물론 지금도 많은 이는 더 멋진 외모를 위해 안경을 내려놓곤 한다. 실제로 영국 여성 3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은 ‘데이트할 때 안경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저자는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에서 안경을 쓰고 지상파 뉴스를 진행해 화제를 모은 국내 여성 아나운서를 언급하며 “누구에게도 안경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낙관한다.
안경이 외모에 미치는 영향이 어떻든 분명한 것은 안경이 있었기에 지식과 학문의 세계가 깊고 넓어졌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말처럼 안경은 “지식 확산의 도구이자 과학적 합리주의를 이끈 발명품이다.” 방대한 이야기를 담은 탓에 성긴 대목도 있으나 일상과 밀접한 안경을 솜씨 좋은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는 대중서다. 불완전한 눈을 대신해 멀리, 그리고 또렷이 볼 수 있게 해주는 안경에 감사를! 576쪽, 2만5000원.
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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