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석레인저가떴다] 여름 야생화 겨울 칼바람..5말6초엔 철쭉의 대화

신용석 기자 2022. 5. 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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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소백산..죽령~비로봉~어의곡 16.4km, 국내 4대 국립공원
1000m 봉우리만 10여개..장쾌하고 부드러운 '한국의 알프스'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소백산의 심장부. 앞산 오른쪽 연화봉, 가운데 산 제1연화봉, 맨 뒷산 중앙 비로봉 © 뉴스1

소백산은 언뜻 작은 산이라는 뉘앙스가 있으나, 백두산이나 태백산에 필적할 만큼 크고 신성하다는 뜻의 이름이다. 우리나라 산악 국립공원 중에서 지리산-설악산-오대산에 이어 4번째로 규모가 큰 산이다. 최고봉인 비로봉(1439m)을 비롯한 1000m 이상의 10여 개 봉우리가 울뚝불뚝 솟아올라 백두대간의 위 아래를 이어주는 국토의 골격이다. 우리나라에서 멸종된 여우를 복원하고 있는, 품 넓은 생태계이기도 하다.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소백산은 바람의 산이다. 특히 겨울의 북서풍은 유명하다. 주변에 큰 산이 없어 거침없이 쇄도한 강풍은 사람 몸무게를 거뜬히 날려보낸다. 어느 겨울날 비로봉에서 칼바람을 맞아 레인저 3명이 서로 부둥켜 안고 몸을 굴려 내려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소백산은 눈의 산이다. 내린 눈은 녹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 높이 1.8m 되는 이정표의 머리 가까이 쌓일 때도 있었다. 요즘은 기후변화로 적설량이 적어졌지만, 여전히 눈꽃과 상고대가 아름다워 한국의 알프스라 불린다.

소백산은 야생화의 천국이다. 워낙 바람이 세차 키 큰 나무가 버틸 수 없기 때문에, 고지대에는 키 작은 나무들만 듬성듬성 자란다. 여기에 안개와 구름이 깔려 습기가 많고, 한낮에는 햇볕이 쨍쨍 비쳐, 온갖 종류의 야생화가 피고 지는 초원을 이룬다. 소백산은 역사가 서려있는 산이다. 영남과 중원·영서의 경계인 이곳에서 신라와 고구려의 격전이 치열했다. 고구려의 온달과 평강공주, 신라의 마의태자, 조선의 대학자 이황의 발자취가 어려있다. 산 위에는 비로봉, 연화봉, 도솔봉 등 불교를 상징하는 봉우리가 있고, 산 밑에는 유서깊은 부석사와 천태종의 본산 구인사 등 많은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 죽령-제2연화봉-연화봉 7㎞…소의 등어리 같은 능선, 첩첩한 산주름 조망

죽령에서 천문대까지 능선의 시멘트길. 깔딱오르막의 신록과 철쭉 © 뉴스1

죽령(689m) 주차장에서 종주산행을 시작한다. 차량을 하산 장소로 이동시켜 주는 '내 차를 부탁해', 도시락을 입산 장소로 보내주는 '내 도시락을 부탁해' 서비스를 이용하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자기의 현재 위치를 가족에게 보내주는 앱 서비스도 있다. 우리나라의 국립공원 서비스는 세계 최고다. 죽령(竹嶺)에 대나무는 없다. 약 1900년 전에 고구려를 치기 위해 이곳에 길을 내다 죽은 신라 군사의 이름(죽죽)을 기려 죽령이라 했다. 이곳에서 둘레길(자락길)을 걸어 풍기나 단양으로 내려가거나 남쪽 능선을 따라 도솔봉(1314m)에 올라 묘적령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나는 북쪽으로 소백산 심장을 향해 백두대간 마루금에 들어선다.

죽령에서 연화봉까지 7㎞는 불행하게도 시멘트 포장길이다. 천문대와 통신시설 관리용 도로다. 특히 제2연화봉까지 4.3㎞는 경사가 급하고 조망도 없어 무작정 걸어야 하는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길이다. 깔딱오르막을 5분쯤 걸어 첫 번째 커브에서 종주길의 첫 철쭉을 만난다. 정상의 철쭉보다 보름쯤 먼저 피어 "어서오세유~" 충청도다운 수줍고 느릿한 인사말을 하는 듯하다. 숨 턱턱 막히고, 땀 뻘뻘 흘리며 1시간30분만에 KT 통신탑과 대피소가 있는 제2연화봉(1357m) 아래에 도착한다. 봉우리 밑을 뺑 돌아, 드디어 풍경이 탁 터진 전망대에서 소백산 등어리를 바라본다. 상하좌우로 엄청 넓은 스케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소의 등어리같이 굴곡진 능선에 첩첩한 산주름이 장쾌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하다.

찬 바람이 등어리를 금방 냉각시켜 벗었던 외투를 다시 입는다. 여름을 재촉하는 바람이 아니라 겨울이 남아있는 바람이다. 산 아래엔 연두빛 신록이 가득하지만, 1400m를 오르내리는 고도에서 여름은 아직 얼씬 거리지 못한다.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까지 부드러운 능선길을 걷는다. 시멘트 길과 숲 사이의 빈 땅마다 민들레 세상이다. 본래는 '대한민국 민들레'의 세상이었지만, 경쟁에서 밀려 이제 '서양 민들레'의 세상이다. 이곳 산꼭대기까지 귀화종(외국에서 들어와 정착한 생물)이 많다. 사람 사는 세상과 같다.

연화봉 철쭉. 5월말 6월초에 소백산 능선 30km 곳곳에 철쭉꽃밭이 펼쳐진다 © 뉴스1
소백산 철쭉. 이 연분홍색은 가장 한국적인 색이다. 사진 조성래 © 뉴스1

연화봉(1383m)의 봄은 연꽃 대신 철쭉이 가득하다. 5월 말, 6월 초가 되면 30㎞가 넘는 소백산 능선 곳곳에 연분홍빛 철쭉 꽃밭이 화려하다. 철쭉꽃의 연분홍 색은 가장 한국적인 색이다. 은근하고 그윽하고 따듯하고 순결하다. 연분홍 '철쭉'에 비해 진분홍 꽃은 '산철쭉'이고, 더 진한 자주색과 빨간색 꽃은 일본이 원산지인 '영산홍, 자산홍' 등의 개량종이다. 진달래 꽃은 먹을 수 있어서 참꽃, 철쭉은 독이 있어서 개꽃이라 불렀는데, 이는 철쭉으로선 억울한 별명이다. 장미에 가시가 있듯이, 독으로 자기방어를 하는 철쭉이다. 영어 이름은 진달래(azalea)보다 철쭉(royal azalea)이 우월하다. 철쭉의 한자 이름은 척촉(머뭇거릴 척(躑), 머뭇거릴 촉(躅))인데, "꽃이 아름다워 사람이 머뭇거린다" 또는 "꽃과 잎에 있는 독을 먹은 동물이 비틀거린다"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연화봉에 가장 가까운 들머리는 희방사로, 희방사 밑 주차장에서 연화봉은 3.7㎞, 2시간30분쯤 걸리는 깔딱고개다. 소백산의 산봉우리에 비구름이 걸려 움직이지 않은 채 집중호우를 뿌리면 계곡물이 금방 불어난다. 희방사 계곡에 홍수와 산사태로 집채만한 바위들이 굴러 공원사무소 건물을 때리고, 승용차들이 종이처럼 구겨져 급류에 쓸려갔던 때가 있었다. 국립공원에서 기상특보가 발효되면 출입을 통제하는 이유다.

◇ 연화봉-비로봉 4.3㎞…동서남북 탁 트인 고원, 야생화의 천국을 걷다

연화봉을 내려와 숲 속에 들어서니 깊은 산에서 자라는 박새와 관중의 초록잎이 투명하고, 그 아래에 양지꽃, 개별꽃, 홀아비바람꽃, 꽃마리 등의 잔잔한 야생화들이 땅을 덮었다. 이 풀밭을 쟁기로 뒤엎은 듯 뒤집어진 곳이 많다. 이른 아침에 멧돼지들이 식사를 한 흔적이다. 뒤집혀진 흙 속엔 이 때를 기다린 씨앗들이 다투어 뿌리를 내리고 재빨리 지상으로 줄기를 올린다. 야생의 세계다.

곧 제1연화봉(1394m)으로 오르는 기다란 데크 계단을 만난다. 예전에 여러 갈래의 길이 나고 흙이 쓸려내려가, 원래 이곳에 많았던 에델바이스(왜솜다리)가 사라졌었다. 사람은 계단으로만 가고, 비탈에 흙과 거름을 붙여 상처를 치료한 결과, 이제 본래의 야생화들이 다시 정착되고 있다. 보송보송한 털로 추위를 이기며 방끗 웃는 '소백산 에델바이스'는 한 여름에 꽃을 피운다.

제1연화봉 오르막 데크. 정상부 왼쪽에 철쭉꽃이 뭉게뭉게 벌겋다 © 뉴스1

제1연화봉에서 비로봉까지는 평지나 다름없는 기다란 구릉, 초원의 길이다. 초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무릎 높이의 풀밭에 발목 높이의 '흰색 바탕에 노란 무늬를 박은' 작은 꽃들이 다소곳하게 피어 있다. 우리나라가 고향인 노랑무늬붓꽃이다. 무릎 높이만 해도 세찬 바람에 풀잎이 좌우로 쓸리는 아우성이지만, 발목 높이는 고요하다. 키를 낮춘 노랑무늬붓꽃의 지혜다. 사람도 강풍에 견디기 힘들면 초지의 바닥에 바짝 엎드리는 대피 방법이 있다.

노랑무늬붓꽃. 새하얀 꽃잎에 샛노란 무늬가 은은하다. 사진 조효원 © 뉴스1

비로봉에 오르기 전에, 천동계곡 최상류의 축축한 고원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주목 숲에 다가선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 할 정도로 오래 살지만, 불법으로 마구 벌채해 1960년대에 3만 그루였던 것이 현재는 3800그루만 남아 있다. 나무들의 나이는 200~800년으로 평균 나이는 350세다. 바람을 피하느라 위로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휘어지거나 꺾여진 모습이 완연하다. 기존의 주목들이 잘려나간 자리에 다른 나무들이 들어와 쑥쑥 크는 바람에 경쟁에서 밀리고, 지구온난화로 숲이 건조해져 이 귀한 주목들이 더욱 쇠퇴하지 않을지 염려스럽다.

비로봉 전경. 왼쪽은 식재한 구상나무 숲. 비로봉은 세계에서 가장 펑퍼짐한 봉우리일 것이다. © 뉴스1
비로봉의 ‘과거와 현재’ 해설판. 마구 다녀 훼손된 길을 한 곳으로 정비하고, 나머지 땅을 본래 모습으로 복원했다. © 뉴스1

비로봉에 오르는 계단의 바깥쪽 경사지에서 허물어지거나 썪고 있는 통나무들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비로봉의 훼손지를 복구하며 식생이 정착할 때까지 땅밀림 현상을 막아냈던 전사(戰士)들이다. 비로봉(1439m)은 둥그스럼하게 올라가 꼭지점은 없는, 세계에서 가장 뭉특한 모양의 봉우리 아닐까? 여기서 바라보는 사방팔방의 경관은 장관 아닌 방면이 없다. 새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두둥실하고, 펑퍼짐한 구릉에는 엷은 신록이 투명하며, 산 아래는 짙은 청록이 선명하다. 남쪽으로 북쪽으로 백두대간의 부드러운 능선이 굽이굽이 커브를 그리며 멀리 사라지고 있다. 산 밑의 옥토와 저수지, 도로와 도시까지도 대자연의 일부처럼 평화롭다. 정상석에 선 사람이 여러 포즈를 취하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그만 하라고 가벼운 야유를 보낸다. 인증사진만 찍고 급히 떠나는 사람도 있고,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며 사색에 빠진 사람도 있다. 비로봉의 세찬 바람이 사람들을 서둘러 하산시킬 때도 많다.

◇ 비로봉-어의곡 5.1㎞…국망봉 바라보며 마의태자와 퇴계 이황을 생각하다

비로봉에서 바라본 소백산 북쪽 백두대간. 오른쪽 끝부분 국망봉, 가운데 능선의 중앙 신선봉, 맨 뒤에 형제봉이 어른거린다 © 뉴스1

비로봉을 뒤로 하고, 어의곡으로 내려가는 삼거리에서 국망봉(1421m)과 그 뒤의 백두대간 줄기를 바라본다. 약 1100년 전에 국망봉(國望峯)에 올라 남쪽의 고국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을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를 그려본다. 기록에는 없지만,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에 마의(麻衣/삼베옷)를 입었다면 추위가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약 500년 전의 따듯한 봄날에 국망봉에 올라 봄 풍경을 만끽하며 글을 썼던 사람도 있으니, 그는 풍기군수였던 퇴계 이황이다. 그는 철쭉의 세계에 감탄하며 "비단 속을 거니는 듯, 호화로운 잔치에 온 기분"이라 했고, 세찬 바람에 마구 휘어진 나무들을 보며 "나무들이 전쟁을 대비하는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삼거리를 내려서니 소백산의 초원 풍경이 점차 사라지며, 서늘했던 강풍이 금방 따듯한 미풍으로 바뀐다. 하얀 줄기의 사스래나무 숲을 거쳐, 컴컴한 낙엽송 숲이 이어진다. 본래 있던 나무들을 벌채하고 인공조림한 숲이다. 낙엽송 밑은 다른 식물이 자라지 않아 낙엽송의 빨간 낙엽뿐이다. 낙엽송을 점차적으로 제거해서 본래 있던 생물들이 어우러져 사는 자연숲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낙엽송이 끝나는 지점부터 기다란 데크계단과 돌계단이 이어진다. 천천히 내려서야 하는 하산길에서 휙휙 뛰어가는 사람도 있고, 축 늘어져 힘겹게 걷는 사람도 있다. 졸졸졸 물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계곡을 만나 길은 넓어지고 편해진다. 비로봉에서 한시간 반, 죽령에서 7시간쯤 걸어 어의곡 새밭마을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머리와 가슴은 확실히 가벼워졌는데, 무릅과 발목은 후끈거린다. 몇 일 쉬어주어야 한다.

형제봉에서 바라본 소백산 자락. 그 너머의 산너울 © 뉴스1

소백산은 '걷기의 천국'이다. 어디에서 오르든 연화봉-비로봉-국망봉으로 이어지는 장쾌한 능선에 올라 확트인 전망과 변화무쌍한 자연을 즐기게 된다. 봄의 신록과 철쭉, 여름의 비바람과 야생화, 가을의 쌀쌀함과 적막함, 겨울의 칼바람과 설경 등 사계절 중 어느 때가 제일이다 할 수 없다. 그래서 계절별로 한 번씩은 가야 소백산을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다. 산 아래에는 소백산 밑을 뺑 둘러 영주-봉화-영월-단양을 잇는 143km의 '자락길'이 있다. 소소한 자연과 마을풍경을 접하며 즐겁게 걷는 '자락(自樂)길'이다. 그 길의 한 모퉁이에 최순우 선생님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라고 멋진 멘트를 날린 부석사가 있고, 한 폭의 동양화라 일컫는 도담삼봉(島潭三峰)과 황포돛배도 있다.

높은 산과 기다란 강, 애환 어린 고개와 풍성한 들판, 고즈넉한 사찰과 서원, 정감 어린 전설과 스토리, 역동적인 액티비티가 함께 있는 그곳, 명산 소백산국립공원이다.

stone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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