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두 번의 시련, 그러나 조성훈의 발걸음은 앞을 향하고 있다!

손동환 2022. 5. 27.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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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2년 4월호에 게재됐다. 본 기사를 위한 인터뷰는 3월 16일 오후 12시 15분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전망이 밝았던 농구 선수에게 ‘무릎 부상’이라는 큰 시련이 찾아왔다. 기량 회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투지’와 ‘근성’으로 시련을 이겨냈다.
그리고 제2의 농구 인생을 시작했다. 핵심은 유소년 선수 육성이었다. 그러나 모기업이 구단 운영 종료를 선언했고, 유소년 선수 육성도 옛 이야기가 됐다. 농구 인생 두 번째 시련은 그렇게 찾아왔다.
하지만 또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이는 대한민국 농구의 역사와도 연관된다. 한국 농구에 존재하지 않았던 독립 구단이 생긴 것. 그 곳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조성훈’이었다.

전도유망했던 공격형 가드, 그의 앞에 찾아온 시련
조성훈은 아마추어 농구의 변방인 상주중학교와 상산전자고등학교, 명지대학교를 나왔다. 그러나 팀의 에이스인 조성훈은 팀을 높은 곳으로 이끌 줄 아는 선수였다.
특히, 상산전자고 2학년 때 추계연맹전과 협회장기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상산전자고의 몇 안 되는 전국대회 우승을 주도했다.
명지대에 진학한 조성훈은 조성원(현 창원 LG 감독)-김태진(현 명지대 감독)-故 표명일(전 양정고 코치)과 함께 맹활약했다. 득점력이 뛰어난 가드로 여러 실업 팀의 스카우트를 받기도 했다. 그 정도로, 조성훈은 전도유망했다.
그 때 KBL이 창설됐다. 조성훈은 인천을 연고로 하는 대우증권(현 대구 한국가스공사)의 부름을 받았다. 하지만 원년 시즌 직전 무릎을 크게 다쳤다. ‘시련’이라는 단어를 넘어설 정도의 큰 부상이었다. 조성훈의 프로 커리어에 방해가 되는 부상이기도 했다.

농구대잔치 세대였습니다. KBL 원년 멤버이기도 했고요.
(KBL이 출범된다고 할 때) 사실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얼떨떨했죠. 그러다가 외국 선수가 들어온 이후, ‘이제는 프로구나’라고 실감했죠.
부상 때문에, 원년 시즌을 뛰지 못했습니다. 경기를 보는 게 전부였죠. 경기를 보면서, 국내 가드진도 할 수 있는 게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그 때는 제럴드 워커 같은 화려하고 테크닉 좋은 가드 유형의 외국 선수들도 많았거든요.
대우증권은 어떻게 입단하게 된 건가요?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삼성과 현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습니다. 특히, 현대 출신이셨던 이충희 선생님께서 “너가 현대로 왔으면 좋겠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마침 오리온과 대우증권이 새롭게 창단했습니다. 오리온은 고려대와 한양대 선수들을 지명했고, 대우증권에서는 연세대와 명지대 선수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정재헌이 대우증권으로 가게 됐죠. 돌이켜보면, 대우증권으로 간 게 좋았던 것 같아요. 명가드셨고 명장이신 유재학 감독님한테 많은 걸 배울 수 있었거든요.
원년 첫 경기를 뛸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출전 기록이 없더라고요.
앞서 말씀드렸듯, 부상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1996년 12월 22일이었을 거예요. 그 때 오리온과 연습 경기 중이었고, 전반전 종료 20초 전인가 점프를 했습니다. 그 때 전희철 SK 감독님한테 밀려 넘어졌고, 오른쪽 무릎이 코트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5~10초 정도 기절했던 기억이 나요. 무릎이 빠져버렸고, 전후방십자인대가 다 끊어졌어요. 파열 이상의 큰 부상이었습니다. 은퇴를 생각할 정도였죠.
또, 그 당시에는 재활 운동 시스템이 잘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피를 뽑고 물리치료를 하는 게 다였어요. 하지만 인대가 망가져 있다 보니, 테이핑을 3번 이상 해도 무릎이 계속 빠졌습니다. 4~5년을 계속 고생했죠.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많은 시간을 나섰습니다.
(조성훈은 1997 시즌 정규리그 6경기에 평균 11분을 나섰고, 플레이오프에서는 6경기에 평균 19분 30초를 뛰었다)

사실 정규리그 초반에는 뛰는 게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저희 팀이 시즌 마지막까지 플레이오프 진출 여부를 알 수 없었고, 당시 최종규 감독님께서는 저에게 “정규리그 후반부터 뛸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침 제가 대구에서 복귀전을 치렀고, 저희가 오리온을 꺾고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했습니다.
복귀를 하기는 했지만, 오른쪽 무릎에 힘을 주기 어려웠어요. 왼쪽에만 힘을 주고 뛰다 보니, 밸런스가 깨졌습니다. 그러면서 왼쪽 발목과 허리도 다쳤죠.
당시에는 제가 망가져도, 팀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이 먼저고, 내 몸은 다음에 챙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팀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고요. 그래서 100%의 몸이 아니어도, 뛰었던 것 같아요.

투혼 그리고 마지막
무릎 부상은 농구 선수에게 치명적이다. 농구 선수의 앞날을 막을 정도의 큰 부상이다.
조성훈은 그런 아픔을 안고 있었다. 게다가 조성훈이 다친 당시에는 ‘재활’이라는 버프(?)도 받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성훈은 지독하게 버텼다. 지독함은 투혼으로 이어졌고, 투혼은 커리어 하이를 창출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회복은 한계가 있었다. 조성훈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타의에 의한 은퇴였기에, ‘미련’이라는 단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1997~1998 시즌과 1998~1999 시즌에는 믿을 수 없는 활약을 남겼습니다.
(조성훈은 1997~1998 시즌 45경기에 출전했다. 평균 20분 43초 동안 8.4점 2.6리바운드 1.6어시스트에 3점슛 성공률 37.5%을 기록했다. 1998~1999 시즌에는 41경기 출전에 평균 34분 57초 동안 11.0점 3.9리바운드 2.0어시스트에 3점슛 성공률 41.1%로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원년 시즌에는 뛰고 나면, 무릎이 빠졌습니다. 무릎에 차있는 피를 매번 뽑아야 했고요. 완벽한 무릎이 아니다 보니, 경기에 거의 나설 수 없었습니다. 뛴다고 해도, 팀과 저를 만족시키는 플레이를 할 수 없었죠.
하지만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컸습니다. 예전의 조성훈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이었죠. 그리고 2~3년차 때 무릎이 빠지는 증상도 덜해졌습니다. 오히려 만성이 되면서, 무릎이 빠진 후 회복 속도가 빨랐습니다. 근력 운동도 하다 보니, 주변 근육이 무릎을 받쳐주기도 했고요.
또, 어떤 동작을 할 때 통증이 없는지, 나름의 요령을 터득했습니다. 여러 요인들 때문에, 준비를 잘 할 수 있었고, 실전에도 나설 수 있었습니다. 또, 실전에서 무릎을 계속 시험하다 보니, 슈팅 밸런스도 좋아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슈팅 성공률이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우지원이 공익근무요원으로 이탈했습니다. 제가 뛸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죠. 우지원이 빠지기는 했지만, 저와 카를로스 윌리엄스, 김훈과 스테이스 보스먼 모두 외곽포가 좋아서, 누가 던져도 슛이 들어갔습니다. 팀 플레이도 잘 이뤄졌고요. 그 때는 농구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렇지만 2000~2001 시즌부터 경기력이 확 떨어졌습니다.
무릎을 다치고 7년 정도 지나니, 예전에 비해 80~85% 정도 회복이 됐습니다. 무릎을 움직이는데 있어, 겁이 덜 났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후배들이 많이 들어왔고, 제가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벤치로 가게 됐죠.
사실 저는 식스맨으로서도 많은 행운을 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만 해도 ‘아직 주전으로 뛸 수 있는데...’라는 미련을 품었습니다. 돌아보면, 어리석은 생각이었죠.(웃음)
2003~2004 시즌 종료 후 은퇴하셨습니다.
유재학 감독님께서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로 가시고, 박수교 감독님께서 새롭게 오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분입니다. 제가 청소년 대표팀에 갔을 때, 박수교 선생님께서 감독님을 맡으셨거든요.
박수교 감독님께서 저에게 “한 번 재기해보자”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 역시 계약서를 쓰려고 했고, 몸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회사에서 갑자기 계약을 못할 것 같다고 통보했습니다. 결국 은퇴를 하게 됐죠.

마음 속에 남아있는 그 이름, 전자랜드
조성훈은 프로 데뷔 후부터 은퇴 시점까지 인천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다. 인천이 조성훈에게 남다른 곳인 이유다.
조성훈은 대우증권과 대우, 신세기와 SK 빅스를 거쳐 전자랜드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전자랜드 유소년 클럽에서 오랜 시간 어린 선수들을 가르쳤다.
어느 순간, 전자랜드는 조성훈의 마음 한구석에 깊이 자리했다. 하지만 2020~2021 시즌 후 구단 운영 종료. 전자랜드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는 ‘전자랜드’를 마음 한구석에 새긴 이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조성훈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전자랜드 유소년 클럽에서 오랜 시간 일하셨습니다. 시작은 어떻게 이뤄진 건가요?
은퇴 후 일산에서 유소년 농구교실을 차렸습니다. 운영이 잘 이뤄질 때, 당시 전자랜드 사무국장님께서 “운동을 다시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최희암 감독님께서 “(조)성훈이가 운동을 다시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더라고요.
체육관에 가니, 제 이름이 적힌 유니폼과 신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차피 은퇴를 다시 해야 하고, 선수를 다시 하면 지금의 농구 교실을 운영할 수 없을 건데,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고민을 했죠.
고민 끝에, 저는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최희암 감독님한테 “선수를 다시 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고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KBL 10개 구단이 유소년 농구 클럽을 창단하고 있었습니다. 최희암 감독님과 전자랜드 사무국에서 제 이야기를 들은 후, “너가 유소년 농구 교실을 운영하고 있으니, 전자랜드 유소년 클럽의 총감독으로 일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셨죠. 제안을 듣고, 저는 전자랜드 유소년 클럽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유소년 선수들을 지도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프로에서만 선수를 했지, 어린 친구들을 가르쳐본 적은 없었습니다. 제 마인드를 바꾸지 않는다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겠다고 생각했죠.
눈높이를 맞추고, 기본기에 신경을 썼습니다. 여기에 나만의 색깔을 가지려고 했고, 나름의 운영 방식을 터득했습니다.
노하우도 있으실 것 같아요.
우선 취미반에 있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에게는 놀이 형식으로 기본을 잡아주려고 했습니다. 재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그 아이들이 자기 에너지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에게는 차별화를 뒀습니다. 처음부터 디테일하게 가르쳤어요. 농구부가 있는 학교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기본기-마음가짐-수비 모두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또, 어떤 포지션이든 소화할 수 있게, 여러 포지션에서 해야 할 움직임들을 알려줬고요.
취미반과 선수반의 코칭 방식이 다르다고 하지만, 공통적인 것도 있습니다. 저희 유소년 클럽은 돈을 받고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강사들 모두 돈의 가치를 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취미반이든 선수반이든, 프로 의식을 가지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식을 갖고 가르치다 보니, 학부모들로부터 좋은 평가도 받았던 것 같아요.
전자랜드가 2020~2021 시즌 종료 후 구단 운영 종료를 선언했습니다. 받으신 충격이 컸을 것 같습니다.
이전부터 해체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계속 운영했습니다. 2020~2021 시즌 후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자랜드는 정말 없어졌습니다. 저는 그 순간까지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사실 전자랜드는 저에게 집 같은 곳이었습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사무국 모두 가족처럼 생각했습니다. 삼산체육관 주변의 향기와 공기들도 제 인생의 한부분과 같았고요. 그렇기 때문에, 표현을 못할 정도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또, 며칠 전에 제가 오리온과 한국가스공사의 경기(2021.03.13., 고양체육관)를 관람하러 갔습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모두 친밀하고 반가웠지만, 가슴에는 전자랜드가 아닌 한국가스공사가 찍혀있었습니다. 이상하더라고요. ‘전자랜드’라는 이름도 언젠가는 잊혀지겠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한국 농구 최초의 독립 구단
전자랜드를 마음 속에서 지워야 했다. 아픔은 컸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재 한국 농구 최초의 독립 구단인 ES스포츠나눔의 감독이 됐다. 그게 조성훈의 새로운 직함이다.
조성훈은 아무도 가지 않은 곳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막막함과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가 걷는 길은 한국 농구의 또 다른 역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성훈은 더 확고한 철학과 신념으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조성훈의 농구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한국 농구 최초의 독립 구단을 창설하셨습니다.
2021년 5월 31일자로 전자랜드를 퇴사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선수반 아이들을 1주일에 1~2번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김포 ES사회협동조합이라는 스포츠 학원을 알게 됐습니다. 그 학원의 이사장님이 제 중고등학교 후배더라고요.
이사장님께서 저에게 체육관 건립과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꿈을 못 펼친 친구들도 많고 동호회 농구를 하는 친구들도 많다. 그 친구들을 지도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독립 구단의 감독을 제안하셨습니다.
고민을 했지만, 이사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농구인으로서 그런 친구들을 위해 도전해보고 싶었거든요.
저희 구단이 지난 해 10월 1일 날짜로 창설됐습니다. 창설된 후, 저는 저희 팀을 알리기 위해 여러 대학 감독님과 중고교 코치님들을 찾아뵙고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저희 구단을 알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올해 3월 1일에 트라이아웃을 했습니다. 15명 정도 신청을 했어요. 독립 구단 창설을 모르는 분들이 많았을 건데,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습니다. 지금은 7명의 선수들과 함께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또, 연습 경기도 많이 잡고 있습니다. 연습 경기를 하려면, 선수들의 몸이 갖춰져야 합니다. 또, 몸이 만들어져야, 연습 경기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선수들에게 남겼습니다. 그렇게 해야 선수들의 목표가 더 명확해질 거고,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도 명확히 파악할 수 있거든요. 선수들도 이를 잘 알고,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감독님의 지도 철학과 운영 방식이 궁금합니다.
소외를 많이 받았고 상처를 많이 받았던 선수들이 대부분입니다. 먼저 웃으면서 소통하는 농구에 중점을 두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선수들의 상처에 무작정 약을 발라주겠다는 건 아닙니다. 제가 약을 발라줘도, 선수들 스스로가 상처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상처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을 수 없거든요.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어요.
그리고 여기에서도 실패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선수 스스로가 그렇게 했다면, 과정을 후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조성훈’을 추억으로 삼는 분들한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명지대학교 농구부를 떠올릴 때, ‘조성훈’이라는 이름을 거론하시는 분들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의 이름에 오르내릴 정도의 실력이 있나?’라는 생각과 ‘부상을 크게 당했는데도, 나라는 사람을 알아봐주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감사했어요.
지금의 저는 독립 구단의 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야 하지만, 보람이 더 큽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맡은 임무를 열심히 한다면, 팬들께서 ‘조성훈이 독립 구단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는구나’라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무엇보다 코로나 시국이라, 다들 힘드실 거예요. 그렇지만 좋은 날도 올 겁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웃는 날이 더 많아질 거예요. 다들 파이팅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제공 = KBL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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